맑스주의적 분석과 혁명적 투쟁 전략
미하엘 프뢰브스팅, 혁명적 공산주의인터내셔널 (RCIT) 국제서기,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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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들어가며
1. 현 위기의 특수성: 3중 파국
이 팬데믹은 얼마나 위중한가?
부르주아지에게 위험했던 순간: 3차 대공황이 2019년에 글로벌 계급투쟁 물결과
동시에 시작됐다
지배계급은 어떻게 대량봉쇄 결정에 도달했는가?
세계화 시기의 최종 종언
미 헤게모니의 종언 이후 강대국들 간 패권쟁투의 새로운 단계
2. 코로나19 글로벌 반혁명의 본질에 대하여
신자유주의 이후의 독점과 국가자본주의
모델로서의 중국?
배외주의적 국가 보나파르트주의로의 결정적 전환
무엇이 “뉴 노멀”이 될까?
예방 반혁명
우리는 반혁명적 공세의 현실 관련성을 과대평가하는가?
3. 뉴 리바이어던 시기 혁명 전략의 근본 원칙
정치반혁명은 맑스주의자들에 의한 정치전략을 요구한다
팬데믹 시기 계급휴전 정책은 우리의 공공보건 방어 투쟁을 약화시킨다
모험주의인가, 체계적인 준비인가?
혁명적 민주주의 투쟁: 새 시기 맑스주의 전략의 핵심 요소
연속혁명 전략의 현실 관련성
이론과 실천에서 국제주의 없이는 혁명 전략 없다!
4장. 향후 계급투쟁의 혁명적 전술과 슬로건
현 정세와 그것이 계급투쟁에 가져올 결과
주 슬로건: 국가비상사태를 민중봉기로 전화하라
기아와 역병: 레닌과 볼셰비키로부터의 몇 가지 교훈
봉쇄 조치 (록다운)의 혁명적 반대자들
향후 대중투쟁에서 우리편과 상대편
5장. 코로나 기회주의 좌파
국가 보나파르트주의적 봉쇄 정책을 실행하는 스탈린주의자들과 좌익 개량주의자들
보나파르트주의적 국가비상사태 선포를 응원하는 “트로주키주의” 치어리더들
자본가 국가에 대한 수정주의적 인식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다”? ㅡ 혁명적 정치에서는 아니다!
국가 보나파르트주의적 봉쇄에 대한 “노동자 통제”?
사회보나파르트주의: 경제주의와 멘셰비즘의 자식
봉쇄 조건에 대항하는 자생적인 대중행동: 좌파의 리트머스 시험지
6장. 맺음말
* * * * *
들어가며
우리는 비상한 역사적인 순간에 살고 있다. 지금 몇 주간에 벌어지고 있는 일은 네 개의 상호 연관된 사태 발전이 결합된 것이다.
1) 3차 대공황, 즉 1929년에 시작한 두 번째 대공황 못지않게 극적인,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파멸적인 침체.
2) 1945년 이후로 제국주의 나라들에서 유례없는 규모의 반민주적 공격 물결. 이와 동시에 전 세계적으로 배외주의적인 국가 보나파르트주의로의 전환과 국가기구의 거대한 확장이 진행되고 있다.
3) 코로나19. 많은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팬데믹으로, 지배계급은 이 코로나19를 세 차원에서 이용하고 있다. 공포를 확산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경제위기의 자본주의적 원인을 덮어 가리고 그로부터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한 수단으로, 배외주의적 국가 보나파르트주의로의 전환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 코로나19를 써먹고 있다.
4) 1914년 1차 세계대전 개전 당초와 비슷한 상황으로, 노동자운동의 다수 부문을 점하고 있는 개량주의 세력들과 이른바 좌파들의 기회주의적 투항 물결이 크게 일고 있다. 지배계급이 팬데믹과 싸운다는 명목으로 인민에게 부과하고 있는 전 세계적인 봉쇄/폐쇄와 민주적 제 권리의 억압을 이들이 전면 지지하거나, 또는 적어도 비난 없이 눈감고 있다.
코로나19를 틈탄 세계적인 반혁명 공세는 역사적인 분수령으로서 매우 복잡하고 특수한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때문에 이 글로벌 반혁명 공세는 맑스주의적 분석과 혁명적 전략·전술 모두에 일련의 질문을 제기한다. 이 책자는 혁명적 전사들이 이 문제를 보다 잘 이해하고 향후 투쟁의 올바른 방향을 찾도록 돕기 위해 썼다. 이 책자는 코로나19 위기의 시작 이래 우리가 발표한 RCIT 문서들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RCIT 시국선언 <코로나19: 글로벌 반혁명 공세를 가리는 덮개>가 있다. 이 책자의 부록으로도 실려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우리의 주장과 논거 모두를 반복하지는 않을 것이고 다만 일련의 쟁점들을 보다 세부적으로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
중요한 단서를 달아두는데, 이 책자는 비상한 상황, 즉 역사적인 위기의 와중에 썼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이 위기의 초기 단계에 썼다. 따라서 이 책자는 여전히 유동 상태에 있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책자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경제공황에 관한 데이터가 초고를 쓴지 며칠도 안 되어 이미 낡은 데이터가 되어버릴 정도로 현 국면이 유동 상태의 과정이라는 점을 필자는 강력히 의식하고 있다.
이 문서를 지금 쓰지 않고, 그림이 보다 분명해질 몇 달 지나서 쓴다면 확실히 덜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맑스주의자들에게는 가치가 없는 학술적인 접근법일 것이다. 혁명가들의 임무는 외부로부터 관찰하고 논평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에 관여하고 전위투사들에게 오늘의 임무를 위한 분석과 방향을 공급하는 것이다. 따라서 혁명가들은 모든 게 다 마칠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 우리의 격언은 맑스가 그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11번째 테제에서 밝힌 저 유명한 명제다. “철학자들은 지금까지 여러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했을 뿐이다. 문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레닌도, 트로츠키도 “일단 실제 전투에 임해보라.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것이다”라고 말한 나폴레옹을 인용하길 좋아했다. 이 비상한 역사적인 상황에서 우리의 임무, 그리고 모든 혁명가들의 임무는 현 사태의 본질을 가능한 한 빠르게, 가능한 한 전면적으로 파악하고 앞에 놓인 전투를 위한 전략·전술을 정립하는 것이다. 맑스주의자들은 지금 선을 그어야 하며, 지금 글로벌 반혁명적 공세에 대항하는 투쟁을 시작해야 하며, 모든 게 분명해질 때까지 기다려선 안 된다. 왜냐하면 모든 게 분명하게 드러날 때란 반동적 사태발전이 새로운 불리한 역관계를 수립하는 데 성공했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임무는 이 과정에 개입하여 가능한 한 최대로 국제 노동자계급·피억압자에게 유리하도록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 책자는 학술적 작업이 아니라, 지금 진행되고 있는 지배계급의 중대한 공세를 파악하고 그에 맞서는 전략을 짜기 위한 시도다. 따라서 이 책자는 또한 노동자·피억압자의 국제적 해방운동에 복무하는 활동가들과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시작된 현 세계정세 격변을 둘러싼 토론·논쟁에 하나의 입장으로 참가, 기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자가 전 세계 혁명가들의 긴밀한 협력을 위한 정치적 기초를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이것이 특히 절실한 것은, 해방투사들이 사회주의혁명 세계당 건설을 앞당기기 위해 명확한 강령적 기초 위에서 통일 단결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면 자본주의 반혁명이 인류와 인류의 생활조건을 파괴하여 야만으로 추락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2020년 4월 12일
1. 현 위기의 특수성: 3중 파국
현 재앙을 3중 파국으로 성격규정 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1929년과 리바이어던 국가와 팬데믹의 결합(combined) 사건이다. 다시 말해 1929년 이래 최악의 경제 침체, 배외주의적 국가 보나파르트주의로의 전 세계적 동시 전환, 위험한 보건 위기, 이 3개의 복합적인 파국이다. 이 세 위기 간의 구체적인 역학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피상적으로는, 팬데믹이 이 세 위기 중 다른 두 위기의 행로를 결정하고 있는 지배적인 요인인 것처럼 보인다. 좀 더 깊이 들어가 이 문제를 보자.
이 팬데믹은 얼마나 위중한가?
얼마나 코로나19는 심각한 질병인가? 의심할 바 없이, 여기서 이 질병의 이후 진로에 대해 진단하는 데는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 질병이 이미 많은 생명을 앗아갔고 이후 더 많은 희생을 치르게 될 위험한 팬데믹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동시에 이 코로나19가 현 시대에서 첫 번째 보건 재앙도 아니고 근래에 세계를 패닉 상태에 빠뜨린 유일한 재앙도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 당장 에이즈 팬데믹을 떠올려보라. 에이즈가 확인된 때 (1980년대 초)로부터 2018년까지 사이에 전 세계적으로 3200만 명이 에이즈 질병으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2018년 한 해만 보더라도 약 3790만 명이 에이즈에 감염된 채 살고 있었고, 결국 77만 명의 사망자가 났다. 그러나 이 질병은 일차적으로 지구 남반구의 가난한 나라들을 타격한 팬데믹이다. 2560만 명 (전체의 67.5%)의 에이즈 감염자가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에 살고 있다. 한편 서유럽과 북미에 살고 있는 감염자는 전체의 5.8%에 불과한 220만 명이다.
에이즈 팬데믹과는 대조적으로 코로나19는 ㅡ 지금까지는 ㅡ 일차적으로 제국주의 나라들에서 발병했다. 먼저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에서, 그 다음 서유럽과 미국에서. 그러나 지금도 남반구의 빈국들을 괴롭히고 있는 다른 많은 역병들이 있다. 따라서 맑스주의자들은 제국주의적 자기중심 이데올로기에 장단 맞추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팬데믹이 가난한 나라들을 덮쳤을 때는 유엔으로부터 악어의 눈물 같은 재정적 빵 부스러기가 던져진다. 그러나 부유한 나라들이 그러한 팬데믹에 직면하면 “세상이 고요하다.” 맑스주의자들은 이러한 반동적인 시각을 취하는 좌익들을 사회제국주의적 오만 죄로 비난해야 한다.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는 데도 글로벌 셧다운은 고사하고 아무 패닉도 자아내지 않은 질병들이 제국주의 나라들에서도 그 동안 여럿 있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매년 전 세계적으로 약 260만 명의 사람들이 ㅡ 별다른 주목도 못 받은 채로 ㅡ 호흡기 감염으로 사망한다.[2] 지난 수십 년 동안 반복해서 발병해온 독감 유행병은 매년 전 세계적으로 29만~65만 명의 사망을 가져왔는데, 이에 대해 지배계급이 지금과 같은 그 어떤 정치적 이니셔티브도 취한 바 없었다. 대량검사/방역 조치도, 셧다운이나 록다운 (봉쇄령) 같은 것도, 집회·시위 금지도 다 없었다. 2017/18년 시즌 전체 독감 사망자는 유럽에서만 약 15만 2천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2015년에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사망자가 가장 많이 난 해를 경험했는데, 이는 독감과 함께 극한의 날씨 탓으로 돌려졌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9주 동안 지속된, 특히 혹독한 독감 유행이 65세 이상 노령자들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쳐 24,000명의 추가 사망자를 발생시켰다. 미국에서만 2017년 만성 호흡기 질환으로 16만201명이 사망하고 암으로 59만9108명이 사망했다.
나아가 자본주의 위기 자체가 공중보건에 심대한 결과를 미친다는 점을 주목하자. 영국 의학전문 잡지 <<랜셋>>지가 발표한 오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실업 증가는 암 사망률 상승과 관련이 있다.” 이 연구의 저자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의 추정으로는 OECD에서만 26만이 넘는 암 관련 사망자가 2008-2010년 경제위기와 관련이 있다.” 우리는 이 수치가 남반구 나라들보다 훨씬 더 나은 보건의료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부유한 제국주의 나라들(OECD)로 국한하여 추산한 수치임을 지적한다.
스탈린주의의 몰락 이후 러시아가 거친 경험은 훨씬 더 극적인 그림을 만들어낸다. 1990년대 전반기 동안 러시아 경제는 40%나 쪼그라들었다. 한 연구에 따르면, 경제 붕괴가 1990년대에 무려 5백만 명의 러시아 남성들의 조기 사망을 초래한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영국 공공정책연구소(IPPR)의 한 연구보고에 따르면, 2012년 이후 영국에서 긴축 삭감의 직접적인 결과로 공공보건 정책의 개선이 중단되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13만 명 이상의 사망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호흡기 질환인 만성폐쇄성폐질환과 하부호흡기감염증, 그리고 암 ㅡ 기도암, 기관지암, 폐암 ㅡ 이 세계 3대 사망 원인임을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선 안 된다. 이 질병들의 많은 사례가 대기 오염과 만성 흡연이라는 두 가지 인공적인 요인을 원인 또는 부분 원인으로 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흡연으로 인한 사망자가 연간 820만 명이다. 그리고 대기 오염으로 매년 약 8백만 명이 조기 사망한다.
이 경우들은, 팬데믹이나 그 밖에 건강상의 위험으로 인한 많은 수의 사망이 지금까지 있어왔음에도 지배계급이 이에 대해 그 어떤 특별한 정치적 이니셔티브를 취한 적이 없음을 보여주는 단지 한 두 가지 예일 뿐이다. 이는 현재의 글로벌 록다운 (봉쇄) 실시의 일차적 동기가 지배계급이 공공보건을 우려해서가 아님을 말해준다.
다음과 같은 반론이 있을 수 있겠다. 코로나19는 새로운 질병이고 현재까지는 백신이 없다는. 그러므로 코로나19는 인민대중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지와 부르주아 권력집단에게도 ㅡ 대통령·총리와 그 가족 및 보좌관들에게까지도 ㅡ 영향을 미친다는. 맞다. 코로나19 팬데믹이 ㅡ 현재까지 다른 팬데믹들보다 희생자가 더 적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ㅡ 제국주의 나라의 지배계급에게서 많은 패닉을 낳고 있는 중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 WHO, UN 등등 글로벌 기구들이 모두 비상벨을 울리고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데, 그 글로벌 기구들을 지배하는 것이 다름 아닌 이들 제국주의 나라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왜 현 팬데믹을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글로벌 위기로 규정하는지 그 이유도 설명해준다. “코로나19는 유엔 설립 이후 우리가 함께 직면했던 것 중 최대의 시험대다.” 반복하건대, 그럼에도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사망자 수는 다른 팬데믹들보다 훨씬 더 적다!
이 팬데믹이 노동자계급에게 심각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자본가계급이 패닉에 빠지고 있는 것일까? 즉 이 대유행병이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그리하여 이윤의 기초가 되는 노동인력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자본가계급이 당황해하는 것일까? 이것 또한 사실이 아니다. 코로나19로 가장 위험에 처하는 사람들은 주로 고령자나 중증질환자이기 때문이다. WHO 유럽지부 대표 한스 클루게 박사는 최근 성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럽 대륙에서 코로나19로 사망한 사람들의 95% 이상이 60세가 넘은 환자다. 전체 사망자의 50% 이상이 80세가 넘은 노인들이었다. 또 10명 중 8명의 사망자가 하나 이상의 기저 동반질환을 가진, 특히 심혈관 질환/고혈압 및 당뇨병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그리고 그 밖의 여러 만성 기저질환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발생하고 있다는 것도 보고를 통해 알고 있다.”
이것은 또한 유럽이 이 팬데믹으로 특히 강한 고통을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클루게 박사에 따르면, “노년층 비율이 가장 높은 상위 30개국 중 한 나라 (일본)를 제외한 모든 나라가 우리 유럽 회원국들이다. 이 팬데믹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들도 유럽 회원국들이다.”
자본주의 생산과정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며, 이윤 논리상 연금제도에 큰 부담만 줄 뿐인 노년층이 죽어가고 있어서 부르주아지가 패닉 단계에 들어간다? 그것은 이상한 얘기일 것이다.
또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제국주의 부르주아지가 남반구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죽을 수 있다고 해서 패닉에 빠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제국주의 부르주아지는 굶주림과 질병, 전쟁으로 인해 매년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결코 신경 쓴 적이 없다! 그런 그들이 왜 지금은 갑자기 신경 써야하겠는가?!
우리가 이 팬데믹이 이후 어디까지 나아갈지 모른다는 것은 사실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독감 유행병이 2017/18시즌 유럽에서만 15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다. 코로나19 위기에 대한 가장 최근의 연구는 첫 번째 물결에서 유럽이 그 비슷한 수의 사망자를 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럽 전체의 사망자가 151,680명으로, 그 중 영국이 66,0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내며 가장 타격이 컸다). 이 팬데믹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거 비슷한 사태 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던 지배계급이, 매년 유행하는 독감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들보다 두세 배 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 있기 때문에 갑자기 마음을 바꿔 경제 붕괴를 감수하고서 기꺼이 대대적인 셧다운을 한 것으로 믿는다면 이는 얼토당토 않는 일일 것이다!
이 모든 것에 더해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 우리가 일련의 문서들에서 되풀이하여 지적했듯이, 지배계급이 팬데믹과의 전투에서 적용하고 있는 권위주의적 방법이 특별히 효율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자국 주민에게 봉쇄령을 내리고 있는 나라들 ㅡ 이탈리아나 스페인 ㅡ 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내고 있다. 대조적으로 자국 주민에게 봉쇄령을 내리지 않고 무상 대량검사를 실시한 한국 같은 나라들은 팬데믹과의 전투에서 훨씬 더 성공적이었다. 이것이 더더욱 주목되는 것은 한국이 상당수의 사람들이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된 나라로서는 중국 다음으로 첫 번째 나라라는 점에서다. 그리고 지금까지 주민에 대한 어떠한 대량봉쇄 없이도 사망자 수 증가를 억제한 나라들이 한국 외에도 또 있다.
그 동안의 모든 경험은 무상 대량검사가 팬데믹과 싸우는 데서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대부분의 제국주의 정부들은 이 방법을 적용하지 않고, 이미 증상이 심한 사람들만으로 검사를 제한했다. 여러 유럽 나라들은 심지어 진단키트를 보내주겠다는 한국이나 중국의 제안을 오랫동안 거절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어이없게도 지난 3월말에 대량검사는 “유용하지 않다”고 천명했다.
게다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정부가 한편으론 사람들에게 사회적 활동을 일체 중단하고 집에 머무르도록 강요하면서, 동시에 사람들이 매일 만나는 직장에서는 비필수적인 생산을 계속 돌리도록 강요한다면 이 얼마나 불합리한가.
자본가 정부들이 주장하는 또 다른 논리는 의료시스템이 붕괴하지 않도록 “시간을 벌기” 위해 봉쇄 조치를 내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정부들은 주민에 대한 대량검사를 시행하고 새로 병원과 중환자실을 건설하는 데 몇 주간의 봉쇄 기간을 활용했을 것이다. 또 보건의료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인원을 대폭 증원하고 급여를 인상했을 것이다. 의지만 있다면 열흘 안에 병원이 건설될 수 있음을 우리는 1월말 우한에서 보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땠는가? 자본가 정부들 일반은 최근 몇 주, 몇 달을 보건의료 분야에 대한 그러한 대대적인 투자를 실행하는 데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봉쇄 조치가 시간 벌기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는 핑계일 뿐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 모든 사실들은 코로나바이러스와 싸우는 것이 제국주의 정부들의 결정에서 일차적인 동기가 아니며, 지금까지 일차적인 동기였던 적이 없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팬데믹 자체가 지배계급에 의한 글로벌 봉쇄(록다운)와 자본주의 경제 셧다운의 주 원인이라고 가정할 어떤 이유도 없다. 과거 유행병 사망자 수에 비할 때 “단지” 그 일부만이 사망했을 뿐인 시점에 이미 지배계급이 그러한 이니셔티브를 취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따라서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글로벌 셧다운은 다른 원인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부르주아지에게 위험했던 순간: 3차 대공황이 2019년에 글로벌 계급투쟁 물결과 동시에 시작됐다
코로나19 위기에 관한 문서에서 우리는 이 팬데믹이 출현한 시점이 세계정치가 중대한 전환점을 거치던 시점이었음을 규명했다. 2019년 하반기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두 가지 사태발전이 일어났는데, 첫째로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가장 극심한 침체가 시작됐다. 둘째, 글로벌 계급투쟁·민중항쟁 물결이 거의 모든 대륙을 휩쓸었다.
우리는 여러 성명과 기사 속에서 이 투쟁들을 분석해왔으므로 여기서는 이 문제를 다루지 않을 것이다. 다만 현재 코로나19 위기를 엄폐물 삼아 취해지고 있는 글로벌 반혁명 공세가 결국 이 투쟁들 거의 모두를 종식시켰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홍콩, 인도, 이라크, 칠레, 프랑스, 카탈루냐를 비롯한 그 밖의 여러 나라에서 인민대중은 최근 몇 주 동안 후퇴하지 않을 수 없도록 내몰렸다.
또 우리는 여러 문서에서 현 대공황의 개막을 분석했다. 우리는 이제 지난해의 자본주의 세계경제 발전에 대한 보다 완전한 상을 가지게 됐기 때문에 몇 개의 수치를 추가하고 여기서는 넘어가겠다.
네덜란드 경제정책분석국(CPB)의 최근 수치에 따르면, 2019년 3~5월에 세계 산업생산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이 지역마다 불균등한 것은 분명하다. 서방의 기존 제국주의 국가들은 이미 2019년에 불황에 들어갔다. 미국이 서유럽과 일본보다 조금 늦게 들어가진 했지만 말이다. 라틴아메리카와 중동도 그러했다. 중국을 제외하고는 아시아도 주춤거렸다. 중국은 일정한 성장동력을 지속하고 있는 단 하나의 주요국이었다. (표 1과 2 참조). 여기서는 중국의 공식 수치가 정말 정확한 것인지, 많은 평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중국의 경제성장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은 일단 접어둔다.
그러나 우리가 지난 문서들에서 지적했듯이, 중국의 지속적인 성장은 거대한 부채 폭발을 동시에 겪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뿐이었다. 실제로 부채 수준은 2008년 이래 어느 다른 주요 자본주의국보다도 중국에서 더 빠르게 증가했다! 이 문제와 관련해 저명한 싱크탱크인 국제금융연구원(IIF)에 따르면 중국의 총부채는 2008년 4분기 GDP의 171%에서 2018년 1분기 299%로 급증했다. 이러한 부채 증가는 그 이후 계속되어, 2019년 3분기까지 중국의 부채는 이미 GDP의 310%에 육박했다. 이러한 부채 폭발이 특히 중국 자본주의 기업들과 관련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비금융 기업의 GDP 대비 부채 비율은 2009년 93%에서 지난해 153%로 껑충 뛰어 세계 최고 수준에 올랐다. IIF는 중국이 세계 비금융 기업 부채를 밀어 올리는 주요 동인이라고 경고했다. 중국의 채권 디폴트 (채무불이행)도 2018/2019년에 기록을 갈아치웠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중국 역시 30년 만에 가장 낮은 경제성장을 경험하면서 동력 쇠퇴기에 빠져들었다. 세계경제가 불황으로 들어가는 같은 그림을 세계무역 감소를 나타내는 다음 표에서 볼 수 있다. (표 3 참조)
표1. 세계 산업생산, 2017-19년
2017 2018 2019
세계 3.6 3.1 0.8
선진경제국 3.1 2.4 -0.3
미국 2.3 3.9 0.9
일본 2.6 1.0 -2.4
유로지역 3.1 0.9 -1.7
기타 선진경제국 4.3 3.0 0.9
신흥경제국 4.0 3.7 1.8
중국 6.5 6.2 5.8
아시아 (중국 제외) 4.2 3.8 0.1
동유럽 / CIS 3.2 2.9 2.1
라틴아메리카 -0.7 -2.2 -5.0
아프리카 및 중동 0.7 1.0 -3.2
표 2. 2017-19년 미국 제조업(%)
연 간 2019년 (각 분기)
2017 2018 2019 Q1 Q2 Q3 Q4
2.0 2.3 -0.2 -1.8 -3.3 0.7 -0.6
표3. 세계 상품교역, 비율 변화
(가격 / 단위 가치: 미 달러화)
2017 2018 2019
5.9 6.1 -2.6
지난 RCIT <세계 정세전망> 문서에서 밝혔듯이, 이 공황의 시작은 글로벌 민중봉기 물결과 결합하여 2019년 가을에 준 혁명적 세계정세를 열어젖혔다. 그리고 2020년 1월에 코로나19가 처음 발병했다. 지배계급들은 코로나19 팬데믹에 대응한다며 대량봉쇄 조치를 취하면서 배외주의적인 국가 보나파르트주의 체제를 구축해나갔다. 이러한 반혁명적 공세를 펴기 위한 엄폐물로 코로나19가 사용된 것이다. 새롭게 열린 준 혁명적 세계정세가 급속히 전개되면서 지배계급들에게 위험했던 순간에 말이다. 말하자면 대공황 개시와 결합된 글로벌 민중봉기 물결이 지배계급들로 하여금 코로나19를 반혁명적 공세를 펴기 위한 엄폐물로 삼게 한 가장 중요한 단일 요인이었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본가계급은 많은 사업장 셧다운으로 공황이 고조될 위험도 감수할 태세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착각에 빠져, 이것이 골이 깊지만 짧은 불황이기를, 즉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V자 불황"이라고 부르는 것이 되기를 바라면서 단기간의 위험 정도는 감수할 수 있겠다고 마음먹었다. 물론 이것은 진지한 과학이기보다는 희망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배계급의 정세전망을 반영한다. 지배계급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위기를 단호한 정치적 개입 (“외생적 충격”)과 글로벌 셧다운에 의해, 그리고 그와 함께 전격적인 긴축 공격과 자본가들을 위한 구제금융 프로그램에 의해 극복할 수 있다고 계산한다. 이와 같은, 골이 깊지만 짧은 불황에 대한 믿음이 바로 지배계급이 경제를 셧다운 하는 그 같은 위험을 불사할 태세를 취하고 있는 이유다. 지배계급은 이 소위 짧은 기간을, 노동자·민중을 겨냥한 충격과공포(shock-and-awe) 공격 ㅡ 2차 세계대전의 언어로는 전격전 ㅡ 을 감행하고 훨씬 더 유리한 역관계 속에서 위기를 벗어나는 데 활용하길 희망한다.
이러한 어리석은 낙관론에 대한 많은 예들 중 하나로, 전 세계에 걸쳐 250명의 경제학자들을 고용하고 있는 영국 옥스포드 경제연구소의 예측을 인용해보겠다. “단기적인 전망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일단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가 완화되고, 통화·재정 부양책이 재량지출의 재개와 결합되면 경기 반등이 매우 강력할 것이라고 ㅡ 역사적 경험에 부합되게 ㅡ 믿는다.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는 기업은 2020년까지의 강력한 종료와 2021년까지의 시작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글로벌 성장률은 연간 기준으로 5.3% 상승하고, 내년 전체로는 평균 4.4% 상승할 것이다.”
역사는 이런 같잖은 성명에 대해 비웃을 것이다 (그리고 이 경제학자들은 그 같은 헛소리를 퍼뜨린 것으로 적지 않은 보수까지 받을 것이다)! 우리가 세계경제에 관한 지난 문서들에서 강조했듯이 제국주의 기업과 국가는 2008/09년의 지난 공황 이전보다 오늘날 훨씬 더 많은 부채를 지고 있다. 이미 현 공황이 시작되기 전에 그랬다. 국제금융연구소는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2019년 3분기 세계 부채가 253조 달러에 육박하는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가계, 정부, 금융·비금융 기업 부문의 총 부채는 2019년 첫 세 분기 동안에 9조 달러 가량 급증했다. 부문별로는 일반정부(+3조5000억 달러)와 비금융기업(+3조 달러)이 가장 큰 폭으로 증가해 전체 세계 GDP 대비 부채 비율이 322%를 넘어서는 데 일조했다.”
이 점은 정부와 함께 특히 비금융 기업에서 그러한데, 국제금융연구소는 또 다른 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기업 부채는 이미 수익에 비해 매우 높고 수익 전망은 악화되고 있다. 75조 달러에 육박하며 급증하고 있는 세계 기업부채는 세계 GDP의 약 93%에 달하는데, 이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의 75%에 비해서도 크게 높다.”
이 모든 것에 더해 제국주의 국가들이 현 경제붕괴 기간 동안 자본가들을 구하기 위해 현재 지출하고 있는 거대한 신규 재정 지원 프로그램들이 있다. 한 미국 경제학자는 연간 생산액의 거의 11%에 달하는 2조2000억 달러 규모의 재정지원 계획이 트럼프에 의해 추진되고 있고, 연준(Fed)의 4조 달러 규모의 각종 재정 프로그램이 그 뒤를 이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 경제학자는 “차입된 돈과 인쇄된 돈의 총액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회의 연간 GDP 총액의 약 3분의 1에 달할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대부분의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에서도 막대한 추가 공적 부채가 쌓여가는 비슷한 과정이 일어나고 있다. 일본 아베 정부는 GDP의 20%에 해당하는 약 1조 달러 규모의 긴급 플랜을 얼마 전 결정했다. 다른 정부들의 긴급 대책은 이보다는 작지만 여전히 매우 큰 규모다. 호주는 GDP의 약 9.7%, 캐나다는 8.4%, 독일은 4.9%, 프랑스는 2%를 지출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모든 계산이 잠정적인 것일 수밖에 없지만 (그리고 이 글이 발표될 때는 이미 낡은 계산이 될 수도 있지만), 현 시점에 경제학자들은 전 세계 정부들이 채택한 재정 비상 프로그램들이 세계 GDP의 약 8%인 7조 달러 규모에 달한다고 추정한다!
물론 경제활동이 무한정 감소하지는 않을 것이다. 1929-33년의 공황도 어느 순간에는 끝났다. 자본주의 생산과정은, 맑스가 <<자본론>> 3권에서 기술한 대로 자본의 확대 재생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번 공황은 짧지 않고 길 것이며 경기상승이 있어도 얕은 회복에 불과할 뿐 강하지 않을 것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이 과정을 지난 공황에서 이미 보았다. 우리가 거듭 강조했듯이 2008/09년 이후의 지난 마지막 경기순환 상승기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약했다. 다음 상승은 부채 액수가 훨씬 더 커진 기초 위에서, 그리고 동시에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보호주의적 국경들로 분단된 상태를 배경으로 해서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아직 자본주의 세계경제 붕괴 과정의 시작에 불과한 시점이라 이런 부진한 회복조차도 요원하다. 이제 시작이라는 점에서 그 붕괴의 강도를 종합적으로 평가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하지만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매주 자신의 예측을 하향조정할 수밖에 없으며, 이 공황이 1929-33년의 위기 못지않게 극적이라는 것은 이미 명백하다.
현재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봉쇄 조치로 인해 매달 2% 씩 생산 감소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OECD의 최근 평가도 그와 같다. “셧다운의 영향이 단기 성장 전망을 상당히 약화시킬 것이 분명하다. 엄격한 봉쇄 조치가 지속될 시 생산량 감소 추정치는 연간 GDP 성장률이 달마다 최대 2%포인트 씩 하락하는 수준일 것이다. 상쇄 요인이 없는 조건에서 셧다운이 3개월 동안 지속되면 연간 GDP 성장률은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4~6%포인트 낮아질 수 있다.”
JP모건체이스은행은 이미 1·2분기 미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하향 조정했다. 이 투자은행은 이제 미국의 실질 GDP가 1분기에 -10% 감소하고 2분기에는 추가로 -25% 감소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불과 3주 만에 무려 1,680만 명의 미국인들이 실업자 명단에 올랐다. 연준(FRB) 정책 입안자 제임스 불라드는 실업률이 30%까지 오를 수 있다고 예측하고 있다. 1929-33년보다 그 규모가 훨씬 더 극적이다! 이 기간에 미국의 실업률은 최고조에 달했을 때가 24.9%였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다. 더 비관적인 예측도 있다. “모건스탠리은행은 세계 최대의 미국 경제가 전례 없는 지원책에도 불구하고 올해 5.5% 감소해 1946년 이후 가장 가파르게 하락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2/4분기에는 38%라는 눈물 나는 수축이 예상된다. 모건스탠리은행은 영국이 단기적으로 1930년대보다 더 나빠질 수 있는 불황으로 향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유로 지역 경제도 연간 10%씩 위축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2008-09년과는 대조적으로, 이번 공황은 제2의 제국주의 경제국인 중국에도 강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2020년 첫 두 달 동안 중국 공업기업의 수익이 1년 전보다 38.3% 급감하였는데, 이 사상 최대의 하락은 코로나바이러스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에 미치는 압도적인 영향을 보여주는 새로운 증거다.” 중국에서도 실업률이 증가하고 있어 사회 안정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 2월 도시 실업률은 2018년 4월 4.9%에 비해 사상 최대인 6.2%로 뛰어올랐다.
하지만 이것들은 공식 수치일 뿐이다. 중국의 공식 데이터는 도시 노동인력(4억4200만 명)만 포괄할 뿐, 경제 변동에 취약한 경우가 많은 이주노동자 2억9000만 명은 제외한다. 펀드매니저 업라이트 에셋의 류천제 수석 이코노미스트의 추산에 따르면, “팬데믹으로 2억5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일을 하고 싶지만, 일자리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마찰적 실업"에 내몰렸을 수도 있다. 만약 사실이라면, 이 수치는 중국의 7억7천5백만 인력의 4분의 1 이상을 의미할 것이며, 정부 통계가 제시하고 있는 6.2퍼센트보다 훨씬 더 높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도에서도 비슷한 극적인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내린 21일간의 계엄령 식 봉쇄령이 4억7천1백만 명의 인도 노동자들에게 파국적인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이 중 19%만이 사회보장 우산 아래 있을 뿐, 3분의 2가 정식 고용계약이 없으며, 최소 1억 명이 이주노동자다. 그 중 많은 수가 인구 밀집 도시에서 황급히 도주하는 모양새로 고향마을로 돌려보내졌다. 논평가들이 말하기를, “1947년 인도-파키스탄 분할 이후 이런 일은 없었다.”
이러한 사태발전의 결과로 세계경제는 역대 급 침체의 한가운데에 있다. 블룸버그 이코노믹스는 유로 지역이 사상 최악의 연이은 분기 후퇴를 겪으면서 상반기에 세계경제가 전년 대비 2% 가까이 위축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골드만 삭스는 유로 지역 경제가 6월까지 3개월 동안 전 분기 대비 11% 이상 위축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아시아개발은행은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에 따른 비용이 4조1000억 달러, 즉 세계 GDP의 5%에 육박할 수도 있을 걸로 예상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세계무역의 전면적인 붕괴와 함께 진행되고 있다. 절망과 당혹감 속에서 보도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라. “트레이드시프트의 최근 자료에 따르면, 3월 8일 이후, 전 세계 기업 간 거래가 눈물 나게 62%나 감소했다.”
세계무역기구(WTO)는 최근 예측에서 2020년 세계 상품 교역량이 최소 -12.9% (“낙관적 시나리오”)에서 최대 -31.9% (“비관적 시나리오”)로 대폭락할 것으로 점치고 있다.
경제학자 누리엘 루비니는 현 공황의 역대 급 측면을 잘 짚고 있다. “코로나19발 세계경제 쇼크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보다, 심지어는 1929년 대공황보다 더 빠르면서도 더 심각하다. 이 앞서의 두 공황에서는 주식시장이 50% 이상 붕락하고, 신용시장이 얼어붙고, 대량도산이 뒤따랐고, 실업률이 10% 이상 치솟았으며, GDP는 연 10% 이상의 비율로 수축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일어나는 데 3년가량 걸렸다. 현 위기에서는 거시경제와 금융에서 비슷한 심각한 결과가 3주 만에 현실화되었다.”
다른 경제학자들은 현 사태를 “물리적 자산 파괴가 없는 전쟁 같은 시나리오”로 성격규정 한다. “미국과 유럽이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을 억제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가운데 적어도 한 세대 내 세계경제의 가장 돌발적이고 심각한 충격이 국제무역 중심 허브를 비롯한 그 밖의 허브들에서 나타나고 있다. 2008년 대침체, 2001년 9.11 테러, 1973년 오일쇼크 등 이들 현대의 위기 중 어느 것도 코로나19 질병만큼 빠르고 급격히 무역 흐름을 위축시키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도 이런 돌발적인 경제 폭락을 가져오진 않았다. 이 갑작스런 경제 대란은 글로벌 공급망을 마비시키고 있고, 또 사업장들이 문을 닫고 소비자들이 집에 머무르라는 명령에 복종함에 따라 선진국들의 가장 북적거리는 도시들을 거의 적막하게 만들고 있다. 로버트 콥먼 세계무역기구(WTO)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블룸버그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물리적 자산 파괴가 없는 전쟁 같은 시나리오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경제학자 아담 토제는 “정상경제는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적나라한 제목을 단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록다운(봉쇄)이 시작되면서 첫 번째 충동은 역사적 유사성을 찾는 것이었다. 1914년, 1929년, 1941년? 몇 주가 이어지면서 점점 더 전면에 떠오른 것은, 우리가 거치고 있는 이 쇼크가 유례가 없는 역사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쇼크라는 사실이다.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의 결과로, 미국 경제는 4분의 1이나 축소될 것으로 지금 널리 예측되고 있다. 이것은 1929-33년 대공황 때 수준이다. 그러나 1929년 이후의 수축이 4년 동안에 걸쳐 이루어진 것인 데 반해 코로나바이러스 내파는 다음 3개월 동안에 일어날 것이다. 이렇게 급속히 추락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태양 아래 뭔가 새로운 것이 있다. 그것도 소름끼치는 새로운 것이 있다.”
요컨대, 우리가 3차 대공황의 시작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1873-96년의 1차 대공황과 1929-39년의 2차 대공황에 이어서 말이다.
지배계급은 어떻게 대량봉쇄 결정에 도달했는가?
당연히 우리는 이 과정의 각 단계에서의 의사결정에 관한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다른 곳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가 가장 유력한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지배계급의 의사결정에서 근본적인 배경을 이루고 있던 것은 2019년 하반기에 (막 시작된) 공황과 글로벌 민중봉기 물결이 결합한 기초 위에서 펼쳐진 극적인 세계정세였다. 많은 나라의 지배계급들이 코로나19 팬데믹을 그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하도록 ㅡ 더 나은 표현으로는, 써먹도록 ㅡ 등 떠민 것이 바로 이러한 배경이다. 그렇다고 코로나19 팬데믹이 “글로벌 음모”의 결과물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즉 전 세계적인 반민주적 공격을 펴는 데서 협력 조정을 위한 강대국들 간의 비밀 협약 같은 것이 있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명백히 사실이 아니다.
이 위기에서 부르주아지는 오히려 더듬거렸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지배층 내부의 좀 더 영리한 부분들 (즉 트럼프, 존슨, 보우소나루 같은 어릿광대들이 아닌)은 곧 이 위기를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과 잠재력을 인식했다. 주도적 대국 중국이 확실히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코로나바이러스는 중국의 주요 공업도시 우한에서 처음 출현했다. 베이징의 스탈린주의-자본가 정권은 계엄령 식 조치들을 배치하고 후베이 등지의 주민 수백만 명에 대해 봉쇄령을 내렸다. 정권이 바이러스를 성공적으로 억제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성공적으로 억제한 것처럼 행세하는 것이 가능했다). 동시에 인민을 통제 아래 묶어놓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은 정권이 최근 위험한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는 점에서 정권에 더더욱 중요했다. 반년여 동안 정권은 전 세계가 바짝 그 추이를 좇은 홍콩에서의 준 혁명적 사태를 경험했다. 이것은 명백히 정권에 걱정스러운 사태전개였다. 이 홍콩의 예가 다른 도시의 중국 노동자들과 청년들에게 영감을 주고 고무시킬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정권의 이 같은 두려움은 2019년 여름 우한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가 보여주듯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다.
베이징 정권이 계속해서 주민을 통제 하에 묶어놓을 수 있을지 아직은 더 봐야 한다. 3월 27일 후베이에서 일어난 대규모 폭동은 이 상태가 확실히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현재로선 시진핑 정권과 정권의 독재적인 방법들이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성공으로 “중국식 방법”이 여타 자본가 정부들과 재계 리더들 ㅡ 서방 제국주의 나라들의 정부들 및 재계 리더들을 포함하여 ㅡ 에게 모델로 되기까지 했다.
실생활에서는 모 아니면 도와 같은 선택지 ㅡ 즉 코로나19 사태가 지배자들에 의한 완전한 음모의 결과물이거나, 아니면 지배자들이 완전히 놀란 상태에서 준비되어 있지 않거나 ㅡ 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염두하는 것이 중요하다. 더 자주, 그 둘 ㅡ 계획과 허 찔리기 ㅡ 의 혼란스런 조합이 일어난다.
간단한 비유를 들자면. 1차 세계대전이 갑자기 터져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계획한 정부가 있었다거나 하는 그런 것도 아니다. 모든 강대국의 지도층들은 군사 계획과 동원 콘셉트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전쟁을 예상했고, 그들의 힘을 증강하고 그들의 적을 지배하기 위해 전쟁을 치를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통치자들은 사라예보의 총격이 있은 후인 1914년 여름까지도 그 같은 전쟁을 벌일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의 시작을 적극적으로 앞당긴 사람들 ㅡ 베를린과 비엔나의 군 총사령부 ㅡ 은 전쟁을 보다 적은 수의 적들에게로 국한하길 희망했다. 그리고 대살육의 시작 이후에도, 모두가 1914년 크리스마스까지는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알다시피, 상황은 꽤나 다른 모습으로 펼쳐졌다.
현 상황과 일정한 유사점이 있다. 올해 초에 누구도 글로벌 록다운과 세계경제 급락을 계획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정부들이 세계경제의 상태와 글로벌 계급투쟁 물결 둘 다에 대해 걱정했다. 게다가, 어떻게 팬데믹에 대비하고 어떻게 대응할지 계획이 존재했다. 최근 발표된 알메디나 귀니치 동지의 기사에서 보듯, 세계은행과 WHO는 우한에서 코로나바이러스가 출현하기 불과 몇 달 전에 그러한 팬데믹에 대해 꽤 정확한 예측을 했다. 그리고 이 글로벌 기구들은 지배계급들이 그러한 사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콘셉트를 개발했다.
그리고나서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가 2019년 10월 뉴욕에서 조직한 팬데믹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 있었다. 악명 높은 “이벤트 201” 말이다. 이 가상 시뮬레이션에서는 ‘캡스’ (CAPS; Coronavirus Associated Pulmulum Syndrome)라고 불리는 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퍼진다. 3개월 만에 이 가상의 질병은 3만 개의 질병과 2천 명의 사망자를 낳는다. 이 시나리오는 6천5백만 명이 사망하면서 18개월 만에 끝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포린 폴리시>>의 보도에 따르면 우한 사태 직후, CIA는 이미 올해 1월에 팬데믹에 대해 경고했다.요컨대 지배계급이 이러한 사태에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고 상상하는 것은 완전히 틀렸다. 지배계급 내에 그런 팬데믹을 예견하고 그에 대비하는 부분들도 있었다.
그래서 팬데믹이 일어나자 지배계급 내 보다 긴 시야를 가진 부분들은 이것이 자본주의 체제 최악의 위기 시기에 반혁명적 공세를 펼 100년에 한 번 있는 기회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그들은 그것을 협력 조정해서 하진 않았지만 중국에서 그것이 효과를 거두자 기회를 알아채고 이어서 글로벌 연쇄반응이 시작되었다.
이 모든 것이 부르주아지 가운데 패닉 상태에 빠진 부분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들이 자기 계급 사람들도 감염될 수 있다는 사실을 좋아할 리 없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현 상황에서 이 점은 특히 유의미한데, 왜냐하면 관측자들이 지적했듯이, 최초 감염자들 중에 엘리트층과 상류층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이 코로나바이러스를 다른 나라로 전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래는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 NPR의 제이슨 보비엔 글로벌 보건· 개발 통신원과의 인터뷰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가르시아 나바로: 이 병에 대해서 얘기해보죠. 글로벌 확산이 사회의 특정 계층에 타격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크루즈 유람선을 탄 사람들 말입니다. 국회의원들과 정치인들이죠. 내 말은, 단지 그 사람들만은 아니지만...
보비엔: 맞습니다.
가르시아 나바로: 그들이 타격을 받았다는 것은 분명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보비엔: 매우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그리고 꽤 흥미로운 일입니다. 1월 하순 프랑스의 스키 리조트에 있던 이들 21명의 사람들 중 일부가 유럽에서 첫 번째 주요 감염자 집단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한 명은 싱가포르를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그가 프랑스에 바이러스를 가져간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스키 그룹은 모두 흩어졌습니다. 일부는 영국으로 갔고 일부는 스페인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프랑스의 다른 지역으로 갔습니다. 그들 21명 중 13명이 양성반응으로 최종 판정을 받았습니다. 알다시피, 크루즈선에는 이런 다른 감염자 집단들도 있었습니다. 크루즈선이 전파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크루즈를 탈 수 있는 어느 정도의 가처분소득이 있는 사람들 얘기입니다. 이 코로나 발병 초기에 나는 홍콩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홍콩에서 바로 첫 발병 사례들 중 일부는 포시즌스 호텔과 W 호텔에서 나왔는데... 이 호텔들은 홍콩에서 가장 비싼 호텔에 속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아프리카나 중앙아메리카처럼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에서 많은 발병 사례가 났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듣는 것은 일차적으로 유럽에서 온 사람들 사이에서 발병 사례들이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르시아 나바로: 하지만 크루즈를 타거나 해외 휴가를 갈 수 있는 중상류층만의 문제는 아니잖나요? 여기 또 다른 그룹이 있는데...
보비엔: 네.
가르시아 나바로: 정말 놀랍군요. 정치인들, 스포츠 스타들, 배우들 등 진짜 사회엘리트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네요.”
우리가 “유명인사”와 부유층의 감염 얘기를 더 많이 듣는 또 다른 이유는 검사를 받지 못하는 많은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들에 비해 이들이 자기 돈을 들여 검사를 받고 더 나은 개인 치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현재의 혼돈스런 글로벌 상황을 초래한 사건들은 패닉과 “음모”와 억압과 경제공황의 혼합물이다.
또 다른 논리를 보자. 많은 사람들 ㅡ 이른바 좌파에 속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ㅡ 이 자본가 정부가 일차적으로 팬데믹을 억제하기 위해 국가비상사태와 봉쇄령을 내리는 결정을 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프로이센 군사 이론가 칼 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라는 유명한 말로 모든 군사적 충돌의 본질을 요약한 바 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V.I. 레닌에 의해 자주 인용되었던 이 명제는 보건 정책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우리는 보건 정치가 다른 수단에 의한 일반 정치의 계속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부르주아지의 보건 정책은 여타 분야의 정책들과 다른 특별한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그렇기는커녕 지배계급의 일반 전략에 종속되어 있다. 그러므로 지배계급이 개시한 정치반혁명 공세는 권력을 유지하고 이윤을 보호하기 위한 그들의 오랜 정치의 계속이다. 그들은 현재의 비상한 상황 (2019년 하반기에 3차 대공황의 시작과 글로벌 민중봉기 물결, 그리고 2020년 1월 이래 코로나19 팬데믹)에 맞춰 이 전략을 조절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세계화 시기의 최종 종언
현 3중위기의 극적인 사태는 또 다른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세계화 시기의 최종 종말을 고한다. 이것 역시 놀랄 게 없다. 지난 몇 년간 RCIT는 자본주의 세계화 체제가 깊은 위기에 처해 있으며 그 종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거듭 지적해 왔다. <세계 정세전망 2017년>을 비롯한 그 밖의 문서들에서 우리는 “세계화 시기가 끝나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끝이 이제 확실히 왔다.
세계무역의 붕괴, 전 세계적으로 강력한 국경통제 실시,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배경으로 지난 세계무역전쟁 2년 동안 인상된 보호주의 관세 등 이러한 요인들이 세계화의 시기가 끝났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사태발전들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 심화를 특징으로 하는 시기에 강대국들 간 패권쟁투 가속화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들이다. 파이는 작아지고 모든 선수가 자신의 몫을 챙기기 위해 서로를 상대로 더 빡세게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게다가, 국가의 정치적 역할을 강화할 필요성 ㅡ 경제 침체와 치솟는 실업률, 팬데믹 등의 결과로 발생한 정치적·사회적 위기로 인해 ㅡ 이 또한 무역과 자본 흐름에 대한 국가 통제를 증대시킬 것이다.
이 시기의 종언이라고 해서 보호주의적 아우타르키 (자급자족 경제)로 전면 퇴각하고 세계무역이 종식된다는 뜻은 아니다. 어느 일국 시장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생산력이 대대적으로 발달해버린 현 단계 자본주의에서는 그러한 완전한 후퇴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얼마 전 예측했듯이, 세계시장의 붕괴는 그러한 전면 후퇴보다는 이 또는 저 강대국이 지배하는 더 큰 블록의 창출을 촉발시키는 쪽일 것이다.
세계화 종식의 중요한 경제적 결과 하나는 상품 가격의 대대적인 상승일 것이다. 즉 세계화 시기에 많은 나라에서 억제되었던 인플레이션이 다시 세계경제의 중심 특징이 될 것이다. 노동자와 도시·농촌 빈곤층의 임금 인상, 물가 통제 등을 위한 투쟁이 갈수록 중요해질 것이라는 의미다.
우리가 과거에 지적했듯이, 이러한 세계화 시기의 종언은 전례가 없는 것이 아니며 이미 전에도 일어났던 일이다. 19세기 말에 세계 자본주의의 팽창으로 국경을 가로지르는 투자와 함께 무역도 대대적으로 증가했다. 그 고점은 1차 세계대전 발발이 첫 번째 세계화 시기를 종식시킨 1913년에 있었다. 두 번째 세계화 시기 ㅡ 지금 종말을 고하는 ㅡ 는 1990년대에 와서야 시작되었다. 첫 번째 시기 세계화의 발전을 보여주는 예로 이 시기 세계무역의 성장을 들 수 있다. 세계 GDP에서 무역의 비중은 1870년에 대략 18%였는데, 1913년에 30%로 증가했고, 1932년에 10%로 붕락했다. 또한 외국인직접투자(FDI) 잔액이 세계 생산량의 9%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1913년에 마찬가지로 세계화의 고점이 있었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이 비율은 1960년 4.4%, 1980년 4.8%로 크게 감소했으며, 1990년대에 와서야 비로소 1차 세계대전 이전과 비슷한 수준을 회복했다.
끝으로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세계화 시기가 진정으로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사건 ㅡ 즉 코로나19 팬데믹과 이에 대한 제국주의 강대국 지배계급들의 배외주의적이고 반혁명적인 대응 ㅡ 에 의해 종언이 고해진 것을 지적하고 싶다. 그와 같은 “물리적 자산 파괴가 없는 전쟁 같은 시나리오” ㅡ 앞서 언급한 대표적인 부르주아 경제학자의 문구를 다시 인용한다면 ㅡ 가 이 역사적 분수령을 그은 최종 요인이 된 것이다.
미 헤게모니의 종언 이후 강대국들 간 패권쟁투의 새로운 단계
RCIT는 수년 전부터 세계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사태발전 중 하나는 패권국 미 제국주의가 쇠퇴하고 중국이 새로운 제국주의 열강으로 부상한 것이라고 지적해 왔다. 우리는 이 두 강대국 간 패권쟁투가 세계정치의 역학관계를 이해하는 데 핵심 요소임을 설명해왔다. 2018년 초 이래의 세계무역전쟁과 그에 따른 미·중 간 냉전은 우리의 분석을 온전하게 확인시켜 주었다. 말 나온 김에 이와 관련된, 또 다른 중요한 사태발전이 러시아의 부상이었다는 점을 밝혀둔다. 중국과 같은 의의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러시아가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또 다른 제국주의 열강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난 몇 년간 중동에서의 사태발전이 보여주었듯이 말이다).
현재 코로나19 위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글로벌 역관계에서 새로운 단계가 펼쳐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이 주도적 지위를 상실한 것은 이제 전 세계의 눈에 가시화되고, 분명해지고 있다. 중국이 코로나19 위기를 수습하고 피해자 수를 제한할 수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반면, 미국은 팬데믹에 대처할 능력이 없어 그로 인해 수만 명이 죽어가고 있다. 유럽 정부들은 중국에 도움을 요청하고 중국의 국가 보나파르트주의 체제를 본보기로 바라본다. 어느 누구도 미국에 지원을 요청하지 않으며, 확실히 어떤 방식으로든 미국을 모델로 간주하는 정부는 없다.
미국의 이러한 거스를 수 없는 쇠락을 인정하고 있는 부르주아 사상가들이 미국 내에서 늘어나고 있다. 대표적인 자유주의 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전형적인 예다. 30년 전 후쿠야마는 소련 붕괴 후 “역사의 종말”을 선언한 유명한 책을 발표했다. 1992년 그는 서방 제국주의의 승리주의를 표현하면서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가 우월한 사회구성체로서 최종적으로 승리했다고 선언한다. 지난 몇 년 그는 이미 등을 보이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그는 코로나19 위기에서 지금 미 제국주의가 노정하고 있는 애처로운 실력을 마주하고는 이렇게 비관주의적으로 말한다.
“팬데믹이 가라앉으면 단순한 이분법을 버려야 할 것 같다. 효과적인 위기 대응의 주요 구분선은 독재국가를 한 쪽으로, 민주주의국가를 다른 한 쪽으로 배치하는 그런 식은 아닐 것이다. 그 보다는, 성과가 높은 독재국가도 있을 것이고, 참담한 결과를 보이는 독재국가도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국가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ㅡ 비록 독재국가들 사이에서보단 작겠지만 ㅡ 결과상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성과에 있어 결정적인 규정 요인은 정권의 유형이 아니라 국가의 능력과, 무엇보다도 정부에 대한 신뢰가 될 것이다.... 민주주의국가는 빠르게 움직이는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비상 권력을 행정부에게 위임한다. 그러나 권력을 위임하려는 의지와 그 권력의 효과적인 사용은 무엇보다도 한 가지에 달려 있는데, 그것은 행정부가 이 권력을 현명하고 효과적으로 사용할 것이라는 신뢰다. 그리고 지금 미국이 큰 문제를 안고 있는 지점이 이 부분이다.,,, 트럼프와 그의 행정부가 불러일으킨 강한 불신, 그리고 그들이 지지자들에게 심어준 정부에 대한 불신은 정책에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종국에 나는, 팬데믹을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이 독재국가에게 더 있는지, 아니면 민주주의국가에게 더 있는지에 관한 폭넓은 결론에 우리가 이를 수 있을 것이라 믿지 않는다. 한국과 독일 같은 민주주의국가들은 위기 대처에서 지금까지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설사 미국이 잘 하고 있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정권 유형이 아니라 시민들이 그들의 지도자들을 신뢰하는지, 그리고 이들 지도자들이 유능하고 효과적인 국가를 주재하는지 여부다. 그리고 이 점에서는 미국의 심화하고 있는 부족주의가 낙관론의 이유를 거의 남겨놓지 않고 있다.”
19세기에 부르주아 정치가들은 오스만 제국이나 합스부르크 군주정을 언급하면서 “유럽의 병자”라는 문구를 즐겨 사용했다. 이제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병자”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할 때인 것 같다.
그러나 현재의 코로나19 위기에서 눈에 띄게 실패하고 있는 것은 미국만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서유럽도 보건 부문이 붕괴되고 수만 명의 사망자가 나는 등 명백히 위기에 압도되고 있다. 게다가, 코로나19 위기는 유럽연합이 여전히 국가별로 찢겨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코로나19 위기가 대륙을 강타했을 때, 회원국들의 구호는 “모두는 각자 자기 자신을 위해”였다. 각국은 오직 자신만을 돌볼 뿐, 팬데믹으로 가장 타격 받은 국가들 (처음에 이탈리아, 그리고 그 다음 스페인)을 지원하는 데 전혀 우선순위를 두지 않았다.
정치·경제·보건 상의 비상사태라는 현재의 3중 위기가 유럽연합의 성패를 좌우하는 순간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둘 중 하나만이 있을 뿐이다. 두 지배적 열강으로서 독일과 프랑스가 강력한 중심을 이루고 정치적으로 보다 중앙집권적인 연합 (유럽 연방이든, 또는 보다 가능성 있는 것으로서 더 부유한 회원국들에 기반을 둔 보다 작은 연방이든)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느냐, 아니면 다 허물어져 단지 느슨한 경제시장으로 남느냐. 후자의 경우, 개별 유럽 국가들은 중국이나 미국 같은 강대국과의 동맹관계 ㅡ 여기서는 유럽 국가들이 종속적인 역할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ㅡ 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른바 팬데믹 채권 발행을 둘러싸고 EU 정부들 간에 진행되고 있는 현재의 협상 결과가 EU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첫 지표가 될 것이다.
어느 경우든 코로나19 위기에서 서방 ㅡ 미국과 서유럽 ㅡ 의 기존 제국주의 열강이 보여준 한심한 대처 능력은 “서구의 몰락”에 대한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유명한 말이 단지 문학적 수사만이 아니라 현 상황에 대한 실제 묘사임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코로나19 위기는 미 제국주의의 패권 종식을 알리는 정치적 전환점을 이룬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그렇다고 미국이 더 이상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강대국 중 하나가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미국은 확실히 가장 중요한 강대국 중 하나이며, 앞으로도 그렇게 남아 있을 것이다. 또 중국이 이제 새로운 패권국이 되었다는 뜻도 아니다. 사실 우리가 볼 때 향후 세계정치의 발전 방향은 패권국 자체가 없다는 것이 특징일 것 같다. 미국은 더 이상 세계정치에 자신의 마크를 달 능력이 없다. 그리고 중국도 (그 밖의 강대국들은 물론이고) 그렇게 할 만큼 충분히 강하지 않다.
이러한 강대국들의 균형상태의 결과는 무엇일까? 그것은 제국주의 간 패권쟁투 ㅡ 주로 미·중 간 ㅡ 가 더 한층 가속화하는 것일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3차 세계대전의 서막으로 성격규정 할 수 있는 시기에 접어들고 있다.
흥미롭게도, 좀 더 영리한 부르주아 사상가들 일부도 그러한 발전 동역학을 인정한다. 잘 알려진 미국의 베테랑 외교관이자 지배계급의 영향력 있는 대외정책 고문이었던 리처드 하스는 새로운 논문을 통해 기존의 미국 쇠퇴 추세가 가속화하고 글로벌 분쟁이 증폭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미 제국주의의 관점에서 세계가 1920년대/30년대와 닮은 시기에 들어가고 있다는 비관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나 팬데믹 이후의 세계는 팬데믹 이전의 세계와 근본적으로 다를 것 같지 않다. 코로나19는 세계사의 기본 방향을 바꿔놓기보다는 그것을 가속화시킬 것이다. 팬데믹과 그에 대한 대응은 오늘날 지정학의 근본적인 특징을 드러내고 강화시켰다. 그 결과, 이 위기는 지난 몇 십 년 동안 세계가 여행해 온 도상의 전환점이기 보다는 중간기착지일 것 같다... 그래도 위기에서 나올 세계는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기울어가는 미국의 리더십, 비틀거리는 글로벌 협력, 강대국의 불화, 이 모든 것들이 코로나19 등장 이전의 국제환경을 특징지은 것들이고, 패데믹은 그것들을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부각시켜놓았다. 그것들은 이후 세계의 훨씬 더 두드러진 특징들이 될 것 같다... 따라서 떠올려 볼 더 적합한 선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시기가 아니라 아마도 1차 세계대전 이후 시기, 즉 미국의 관여가 감퇴하고 국제적 격변이 고조되는 시기일 것이다.”
이러한 사태전개는 맑스주의자들에게는 놀라움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우리는 여러 RCIT 출판물에서 그러한 사태발전을 예측해 왔다. 지금 혁명가들의 과제는 이러한 사태발전에 정치적으로 대비하고, 제국주의 히드라와 싸우는 데서 노동자계급과 피억압자를 도울 수 있는 강력한 국제 조직의 형성을 앞당기는 것이다!
개량주의·중도주의 좌익의 대부분이 새로운 제국주의 열강으로서의 중국 (및 러시아)에 대한 맑스주의적 분석을 완고히 거부하면서 그러한 사태전개에 대비하는 데 완전히 실패한 것은 예상에서 역시 벗어나지 않는 그들다운 것이다. 그들은 중국을 미국에 대항하여 지지해야 하는 진보적 국가, “사회주의” 국가, “반제국주의” 국가로 보거나, 아니면 중국 (및 러시아)을 일종의 반식민지 또는 “아제국주의” 국가로 성격규정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잘못된 분석은 미국에 반대하여 중국 (및 러시아)을 편드는 길을 연다. 요컨대, 중국과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본질을 인정하는 데 실패할 때 이들 좌익이 친중·친러 사회제국주의로 빠져버리는 것은 필연적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중·러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인정하는 데 실패할 때 결과는 강대국들 간 패권쟁투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실패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세계정치의 이 핵심 특징 ㅡ 오는 시기에 훨씬 더 중요해질 특징 ㅡ 을 이해하는 데 실패할 때는, 결과는 잘해야 완전한 혼란이고 최악의 경우는 이 또는 저 강대국에 대한 완전한 사회제국주의적 굽실거림일 수밖에 없다.
2. 코로나19 글로벌 반혁명의 본질에 대하여
이 장에서는 현 글로벌 반혁명의 특징들과 그 방향에 대해 좀 더 상세하게 다루고자 한다. 그 전에 먼저 우리가 이러한 시도의 한계를 십분 인식하고 있음을 밝혀둔다. 당연히 이 같은 초기 단계에 세부적인 성격규정을 제시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실제로 주도적 부르주아지 써클들 자신들이 여전히 향후 진행방향을 놓고 전면적인 토론 중에 있다. 더욱이 향후 대대적인 계급투쟁이 불가피하며, 이 계급투쟁이 이후 발전방향에도 의당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럼에도 여러 객관적인 경향들을 볼 수 있는데, 세계정치의 지난 사태발전에서 비롯한 경향뿐만 아니라 현 자본주의 위기의 본질에서 비롯한 경향이 있다. 모두 일정한 방향을 지시하고 있다. 향후 계급투쟁의 도전과제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객관적 경향들을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1920년대 스탈린주의 사상 단속 이전 소련의 주도적인 맑스주의 철학자 아담 데보린은 “맑스주의자는 무엇보다도 전반적 발전 방향을 가늠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실로 기본 동역학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이는 혁명가들은 정치적 방향 상실로 빠져버릴 것이다.
막 열린 새 시기에 전개되고 있는 부르주아 정치의 발전에 대해 성격규정을 내리는 것으로 시작해보자. 위에서 언급한 한계를 의식하며 우리는 자본주의의 현 발전방향을 포괄적으로 다음과 같이 지적할 수 있다.
a) 독점 강화
b) 국가자본주의
c) 국가 보나파르트주의
d) 배외주의
이러한 방향들에 대해 보다 세부적으로 논의하기 전에 일반적인 평가를 먼저 해보자. 우리는 이 네 가지 특징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고 본다. 1929년 수준의 경제적 파국은 불가피하게 대대적인 독점화 과정을 가속화시킨다. 큰 물고기가 많은 작은 물고기들을 잡아먹는다. 특히 그 큰 물고기가 배고플 경우에는 말이다. 깊은 공황기에 대자본가들은 국가로부터의 더 많은 도움과 규제를 필요로 한다. 대자본가들은 잠재적으로 반란 기세에 있는 대중에 대한 “강한 주먹”이 필요하다. 그리고 국외의 자본가 라이벌들에 대한 “강한 주먹”도 필요하다. 이 모든 동역학은 필연적으로 제국주의 나라들의 독점 부르주아지를 배외주의적 국가 보나파르트주의 방향으로 몰아간다. 당연히 이 과정은 각국 상황 및 계급들 간 투쟁의 진로에 따라 서로 다른 형태와 서로 다른 속도를 취한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이러한 과정이 일반적인 추세로 나타날 것이다.
신자유주의 이후의 독점 강화와 국가자본주의
첫째, 위에서 우리가 보여주었듯이, 현 자본주의 세계경제 침체는 그 골이 너무도 깊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소부르주아 자영업 층과 나아가 중소 자본가들의 파산이 광범위하게 일어날 것임을 뜻한다. 많은 나라들에서 일찌감치 나오고 있는 보도들이 이를 확인해준다. 이 과정은 미국이나 서유럽 같은 “자유시장” 나라들에서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진행된다.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 지에 따르면,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을 강타하면서 1분기에 46만 개 이상의 중국 기업들이 영구적으로 문을 닫았다.”
이것은 한편, 대기업의 시장 지배력이 한층 더 커질 것임을 의미한다. 즉 이 위기의 중요한 결과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독점화에 더 큰 도약이 있을 것이다. 그에 따라 훨씬 더 적은 수의 제국주의 국가 독점체들이 세계시장을 장악하고 초과이윤을 전유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 독점체가 시장과 가격을 조종할 훨씬 더 강력한 지위를 점할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결과와 함께 중요한 정치적 결과도 있다. 상당 부분의 소자본가들 및 소부르주아 제 계층의 위기, 고통, 절멸은 부르주아 체제의 지배 엘리트 ㅡ 독점자본가들 및 그들과 연계된 정치가들·장군들 ㅡ 가 지금까지 자기 지배체제의 한 기반이 되어온 자본주의 사회의 중요한 층을 잃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필사적인 상황으로 내몰리는 소자본가와 소부르주아 제 계층은 급진화가 불가피할 것이고 좌우 어느 쪽으로든 방향을 틀 것이다. 전위가 노동자계급을 전장으로 이끄는 데 성공하면, 전위는 이런 층들에게 리더십을 제공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층들은 종교적 반계몽주의나 파시즘으로 눈을 돌릴 것이다.
둘째, 현재의 거대한 붕괴 때문에 불가피하게 자본가 국가가 경제생활에 대규모로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앞 장에서 개괄한 바와 같이, 우리는 이미 대대적인 경제 지원 프로그램을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2008-09년 대침체 (이른바 “글로벌 금융위기”) 때와 같은 제한된 성격의 국가자본주의적 개입이 단순히 재현되는 수준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이번 경제파탄이 훨씬 더 혹독하기 때문이다. 3차 대공황은 불가피하게 많은 은행과 업체의 파산 임박으로 이어질 것이다. 따라서 자본가 국가가 대대적으로 개입하여 그러한 기업을 인수하거나, 타 기업과의 합병을 강요할 것이다.
더욱이 세계화의 붕괴를 고려할 때 국가들 간의 경쟁적 다툼이 ㅡ 따라서 국가들의 경제적 역할도 ㅡ 증가할 것이다. 여기에는 관세, 수출 지원, 외국의 경쟁을 제한하기 위한 규제 등이 있다. 리처드 하스 같은 부르주아 주류 사상가들도 이러한 상황 전개를 인식하고 있다. “세계무역은 부분적으로 회복되겠지만, 그 중 더 많은 부분을 시장보다는 정부가 관리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신자유주의의 정치적·경제적 파산을 보여주는 것으로, 부르주아 진영의 영리한 관측자들도 이미 인정하고 있다. 물론, 좌파 자유주의자들과 케인스주의자들은 신자유주의 모델이 결국 자본주의를 망칠 것이라고 항상 선언해왔고, 따라서 그러한 파탄을 피하기 위해서는 국가자본주의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역설해왔다. 당연히 이러한 논자들은 현 사태로 자신들의 옳음이 완전히 확인되었다고 보고 있다. 가디언의 글로벌 환경 편집자 조나단 왓츠는 이렇게 썼다.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은 우리 시대를 규정하는 정치적 문제인 ‘위험을 어떻게 분산시킬 것인가’라는 문제의 절박성을 일깨웠다. 기후 위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이 문제에서도 특히 부적합한 체제로 입증되고 있다... 이 팬데믹의 결과가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가장 파멸적인 실패 중 하나로 판명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코빈 식의 노동당 노선을 지지하는 영국의 저명한 진본 언론인 폴 메이슨도 현 글로벌 위기를 “새롭고 매우 다른 자본주의 모델”을 실시할 기회로 보고 있다. 알 자지라 홈페이지에 게재된 최근 논평에서 메이슨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좌파 경제학자들은, 장기적으로 성장 정체와 높은 부채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정책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해 왔다. 자동화로 인해 괜찮은 일자리가 불안정하고 희소한 일자리가 되면서 국가가 시민들에게 보편적 소득을 지급하는 정책, 이러한 정책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중앙은행이 국가에 직접 대출해주는 정책, 이윤으로 운영될 수 없는 공공 필수 서비스를 유지하기 위해 주요 기업들을 대규모로 공공 소유로 전환하는 정책. 아주 드물게 과거에 이러한 정책들이 투자자들에게 제안됐던 경우 보통 반응은 정중히 머리를 가로 젓는 것이거나, 아니면 ㅡ 소련 공산주의의 붕괴를 목격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ㅡ 격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본주의를 죽일 것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그러나 이제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 여기 있다. 보편적 지급, 국가 구제금융, 국가 부채에 대한 중앙은행의 재원 조달, 이 모든 조치가 그 주창자들조차도 충격을 받을 정도로 급속도로 채택되었다... 나에게는, 이러한 긴급 조치들은 언제나 상상 가능한 일이었다. 2015년 이래로, 나는 우리가 새로운, 매우 다른 자본주의 모델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 ㅡ 고령화 인구 지원에 따른 경제적 비용 때문이 아니라 하더라도, 기후 변화의 위협 때문에라도 ㅡ 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코로나19 위기는 모든 것을 단기적인 차원 안으로 가져왔다. 2020년대 중반에 이로부터 생겨나오는 자본주의는 이미 수백억 달러의 기본소득을 지급하고, 항공사와 호텔 체인을 국유화시킨 자본주의일 것이다. 그리고 선진경제국들의 정부 부채는 GDP의 평균 103% 수준인 현재보다 훨씬 더 높을 것이다. 얼마나 더 높을지는 모르는데, 왜냐하면 GDP가 어디까지 떨어질지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지금 글로벌 자본주의가 파탄나면서 점점 더 많은 수의 주류 부르주아 논자들도 더 이상 신자유주의 모델이 자본주의 체제를 운영하기에 적합하지 않으며 상당 규모의 국가자본주의적 규제·조절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수십 년 동안 글로벌 포트폴리오 전략가로 복무하고 있는 마셜 아우어백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서 탈피하여 국가 산업정책과 함께 국가의 보다 강력한 역할로의 전환을 주창하는 기사를 연재했다. 그는 최근 다음과 같이 썼다.
“지금으로선, 우리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산업에 소재·부품 등을 공급하는 해외 업체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줄이기 위해 엔지니어들이 말하는 소위 리던던시 [redundancy; 실제로 필요한 요소보다 더 많은 요소를 준비함으로써 보다 안정성을 유지하는 운영 기법]를 우리 시스템에 더 많이 구축함으로써 공급망 취약성을 줄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전시 기간이나 대규모 경제난 (대공황 같은) 때 나라가 일하는 방식 ㅡ 포괄적인 정부 주도 행동 (오늘날의 지배적인, 그리고 점점 더 구식이 되어가는 경제·정치 신학의 많은 부분에 역행하는) ㅡ 과 유사한 방식으로 국가 자원을 동원할 필요가 있다. 즉 일관성 있는 국가산업정책의 부활 말이다. 글로벌 경제를 살리기 위해, 역설적으로 우리는 글로벌 경제가 덜 필요하다. 민간부문/ 공공부문 균형이 후자 [공공부문]에 유리하게 변화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제조업에서의 다국적 기반/ 일국적 기반도 마찬가지로 후자에 유리하게 변화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코로나19는 우리의 경제발전 모델 전체를 다시 생각해 볼 기회이기보다는, 그저 글로벌 자본주의가 겪는 일련의 재난 사슬 속의 또 하나 재난에 다름 아닐 것이다.”
아우어백은 최근 발표한 또 다른 논설에서 그러한 보호주의적, 국가자본주의적 정책을 좀 더 상세히 설명하면서, 현대 기술이 그러한 변화를 구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팬데믹은 새로운 지배 모델 ㅡ 여러 면에서 코로나19 이전에 형체를 갖추기 시작한 ㅡ 이 세계를 향해 작전 개시에 들어가는 디데이 같은 것으로 역할을 할 것이다. 그 모델의 중심에 있는 선진 혼합시장경제국들은 그들의 시장에 더 밀접한 첨단 생산에 투자하는 것 대비, 국제 공급망을 유지해나가는 데 따르는 보건 위험과 증가하는 군사적 비용을 따져보고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 제품 수출을 늘려갈 것이다. 지난 50년 동안 노동 가격 우위를 바탕으로 국제 공급망에 스스로를 얽어맴으로써 발전해온 수십 개 경제국들은 새로운 과정에서 점점 더 제외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글로벌 파워를 둘러싼 경쟁은 탄소 에너지 자원에서 벗어나, 첨단기술 경제 모델을 떠받치는 데 아주 중요한 광물 및 부품 소재의 채광·제련 쪽으로 중심축을 점점 더 옮겨갈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수개월, 수년 동안 석유를 넘어선 "전략 비축물"과 "국가 비축사업"에 대해 훨씬 더 많이 듣게 될 것이다....
이들 기술 [인공지능, 비 탄소 에너지원, 나노테크놀로지 등과 같은 - 인용자]의 집합적 힘은 한 나라의 국경이나 공동 시장 밖에서 더 값싼 노동을 찾는 매력을 ㅡ 그리고 이들 기술이 수반하는 비용도 ㅡ 감소시킬 것이다. 이러한 방향을 따라 앞서 나가고 이러한 형태의 생산에 필요한 광물들에 접근할 수 있는 나라들은 그들의 기존 소비 시장에 연결되어 번창하게 될 것이며, 마침내 새로운 국제 수출입 사슬로 이어질 동력을 구축할 것이다. 이러한 추세선들은 소매업과 서비스산업의 쇠퇴를 가속화할 것이다....
많은 유럽 나라들과 중국, 한국, 일본과 같은 아시아 나라들은 이러한 전환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는 나라들이다. 엄격한 국가 주도 자본주의 전통을 바탕으로, 이들 나라들은 어떻게 국가의 역량과 방향이 더 한층 산업 발전을 추동할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미국이 충분히 그것을 할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만약 지배적인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온존한다면, 그리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오프쇼링 [사업 해외 이전]으로 미국은 코로나19에 준비되어 있지 못했다. 오프쇼링은 또한 세계화에 대한 광범위한 재검토도 야기했다. 한때 경제 민족주의자들의 이단(異端) 피난처로 여겨졌던 것이 이제는 다시 존경받을 만한 것이 되었다. 이 팬데믹이 아니었더라도 미국 경제 모델의 토대는 실패하여 급속히 쓸모없는 것이 되고 있었다. 질문을 해보자. 세계가 탈 탄소 미래로 나아가는 상황에서 미국 경제는 금융, 보험, 부동산 같은 지대 추출 부문이나 할리우드 영화, 스마트폰 앱, 또는 석유와 천연가스 수출 같은 점점 지엽적인 것이 되고 있는 부문의 우위를 털어버리고 무리의 선두 집단에 합류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코로나19는 더 치명적인 질병의 전조에 불과한 것인가?”
현 위기 시작 전에 이미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모델을 대신하여 국가자본주의적 대안이 필요하다고 인식한 부르주아 사상가들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정부 자문위원이자 골드만삭스에서 일한 바 있는 크리스토퍼 조이 호주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2019년 9월에 이렇게 썼다.
“시장 신호를 존중해 반세기 이상 번영을 견인해온 전통적인 자본주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아닐지 모르지만, 그것은 확실히 국가주의다. 그리고 중앙은행과 재무부가 민간 시장가격을 직접 관리하는 일에 뛰어든 이후로는 거기서 결코 빠져나오지 못했다. 변덕스러운 투자자들의 기분에 운명을 내맡기기보다 운명을 지배하려고 하는 것은 너무 유혹적이다. 그냥 시진핑한테 물어보라. 아이러니하게도 현 세계무역 소동을 놓고 볼 때 서방과 중국이 그들이 신봉하는 경제정책 면에서 지금보다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진 적은 없다.”
우리는 지배계급 서클들 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현재의 방향전환 논의를 맑스주의자들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몇몇 부르주아 논자들을 폭넓게 인용했다. RCIT는 신자유주의를 자본주의의 유일한 또는 가장 반동적인 형태로 여기는 많은 좌파 그룹들과 이론가들의 중대한 오류를 항상 비판해왔다. 두 가정 모두 틀렸고 이것은 이제 더욱 명백해졌다. 이는 20세기 자본주의 전 역사에 걸쳐 명백하게 드러난 바다. 1930년대에 다양한 형태의 에타티즘 (국가주의)이 있었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파시스트 정권 하에서뿐만 아니라 북유럽 나라들에서도 시행된 국가자본주의적 규제·조절이 그것이다. 이후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서유럽은 물론, 그 밖의 나라들에서도 자본주의 경제에 국영기업 부문이 꽤 많이 있었고, 복지국가 및 국가경제계획도 시행되었다. 1950년대 이후 급속한 경제성장을 경험한 동아시아 나라들에서도 국가자본주의적 규제·조절이 큰 역할을 했다. 일부는 (한국이나 대만과 같은) 친미 군사독재였고, 다른 일부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형태를 유지했다 (일본).
이러한 종류의 국가자본주의적 규제는 1980년대 이후 많은 나라에서 상당 부분 축소되었지만, 1989-91년 이후 자본주의가 부활한 옛 스탈린주의 국가들에서 재기 무대를 가졌다. 중국 (및 베트남)과 같은 나라들에서 특히 그랬고, 러시아와 일부 중앙아시아 공화국들에서도 ㅡ 정도는 좀 덜하지만 ㅡ 그랬다. 실제로 이들 국가 중 가장 강력하고 성공적인 국가인 중국은 오랜 패권국 미국에 도전하는 새로운 제국주의 강대국이 되었다.
더욱이 과거에 우리는, 극심한 정치적 위기의 시기에는 지배계급이 국가자본주의적 규제로 방향 전환할 태세가 되어 있다는 것도 보아왔다. 예를 들어, 1914-18년 1차 세계대전 동안 전쟁에 총력을 기울여야 필요성으로 인해 나라의 모든 경제적 자원을 집중시키고 규제하는 것이 절실해졌던 것이 그런 경우다. 이를 “전쟁 사회주의”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노동자운동의 개량주의적 다수파는 이러한 사태발전을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발걸음”이라고 환영하며, ‘자’국 제국주의에 대한 사회배외주의적 조국 방어의 구실로 삼았다.
모델로서의 중국?
각종 개량주의자들과 스탈린주의자들은 신자유주의가 ㅡ “중국 모델”과는 대조적으로 ㅡ 자본가들을 위한 부의 축적에 가장 잘 봉사하기 때문에 서방 부르주아지가 선호하는 모델이어 왔다고 주장했다. RCIT가 거듭 지적한 바와 같이, 이것은 진실이 아니며, 모든 입수 가능한 사실들과 ㅡ 중국 측뿐만 아니라 서방 측 공식 소식통에서 나온 사실들과도 ㅡ 모순된다. 여기서는 몇 가지 사실을 가지고 이 테제를 증명하는 데 국한하고 넘어갈 것이다. 독자들은 우리가 지난 몇 년 동안 이 문제에 대해 발표한 다양한 문서에서 더 많은 예를 찾을 수 있다.
지난 10년 동안 스탈린주의-자본가 정권은 비상하게 급속한 자본축적 과정을 가능케 했다. 그 결과, 사회적 불평등과 자본주의 기업 및 슈퍼리치 억만장자의 수가 극적으로 증가했다. 예를 들어, 2018년 세계 불평등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 인구의 부자 상위 1%의 소득 점유율은 1980년에서 2016년 사이에 7%에서 14%로 두 배가 되었다. 보고서는 중국을 전 세계 상황과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전체 국민소득에서 단지 이 상위 10%가 차지하는 비중이 유럽 37%, 중국 41%, 러시아 46%, 미국-캐나다 47%,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 브라질 · 인도 약 55%에 각각 달했다. 우리의 추산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지역인 중동에서는 상위 10%가 국민소득의 61%를 차지하고 있다.”
이 결과는 중국에 “사회주의”가 존재한다는 스탈린주의 신화를 허물 뿐만 아니라, 30년 전까지도 중국과 러시아에 자본주의가 존재하지조차 않았던 점을 염두 한다면 더더욱 놀라운 일이다! 오늘날, 이 두 나라에서의 불평등은 기본적으로 유럽의 오랜 자본주의국들보다 더 높고 북미와 거의 같은 수준이다.
이러한 추세를 확인하는 것이 또 있는데, 지난 몇 년 사이에 중국이 가장 많은 (중국 자료에 따르면), 또는 두 번째로 많은 (서방 자료에 따르면) 수의 억만장자를 가진 나라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중국에 본사가 있는 <후룬 리포트> 2019년 호는 “중국이 억만장자 658명으로 4년째 세계 1위를 달리면서 584명인 미국보다 74명 앞서 있다”고 밝혔다.
세계 시장에서 선도적인 자본주의 독점체들을 살펴볼 때도 같은 그림을 볼 수 있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춘이 발행한 글로벌 순위표 <포춘 글로벌 500> 2019년 호에 따르면 중국은 이제 오랜 패권국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표 4 참조).
표 4. 글로벌 500대 기업 상위 10개국, 2019년
나라 기업 수 점유율 (%)
중국 (대만 포함할 경우) 119 (129) 23.8% (25.8%)
미국 121 24.2%
일본 52 10.4%
프랑스 31 6.2%
독일 29 5.8%
영국 17 3.4%
한국 16 3.2%
스위스 14 2.8%
캐나다 13 2.6%
네덜란드 12 2.4%
세계 2000대 기업에 대한 순위표인 이른바 <포브스 글로벌 2000>도 같은 그림을 보여준다. 표 5에서 우리는 지난 20년 사이에 중국의 기업들이 다른 독점체들 대비 급부상한 것을 볼 수 있다. 2003년부터 2017년까지 보면, 미국이 여전히 최강국이지만 그 비중은 776개 기업(38.8%)에서 565개 기업(28.2%)으로 상당히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동시에 중국의 점유율은 급격히 증가하여 이제 중국이 강대국 중 넘버 투가 되었다.
표 5. 국가별 세계 2000대 기업, 2003년 및 2017년 (Forbes Global 2000 List)
2003년 2017년
기업 수 점유율 기업 수 점유율
미국 776 38.8% 565 28.2%
중국 13 0.6% 263 13.1%
일본 331 16.5% 229 11.4%
영국 132 6.6% 91 4.5%
한국 55 2.7% 64 3.2%
프랑스 67 3.3% 59 2.9%
캐나다 50 2.5% 58 2.9%
인도 20 1.0% 58 2.9%
독일 64 3.2% 51 2.5%
요컨대, 중국 국가자본주의 모델은 “사회주의”와 전혀 관계없고, 반대로 신흥 제국주의 독점 부르주아지의 이익에 강력히 봉사하는 모델이다. 지난 20년 동안 중국의 굴기와, 특히 현 코로나19 위기 동안 중국이 과시한 실력은 서유럽을 포함한 여타 자본가 정부들에게 중국 국가자본주의를 하나의 모델로 점점 더 부각시키고 있다. 그렇다고 유럽 제국주의 정부들이 “중국 모델”을 모방하기를 원한다거나 모방할 수 있다거나 라는 얘기는 아니다. 이 두 지역의 역사적 배경도, 계급세력 관계도 서로 다르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점은 신자유주의 모델도 마찬가지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에서 결코 같은 유형의 신자유주의 체제가 존재한 적은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확실해 보이는 것은, 더욱 더 많은 수의 부르주아 정부들이 깊은 위기가 가하는 압박과 “중국 모델”이 준 인상 하에 상당히 더 많은 국가자본주의 정책 및 국가 보나파르트주의의 요소들을 실시하는 쪽으로 점점 더 기울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사태발전이 맑스주의자들에게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겠다. 실제로 레닌은 이미 한 세기 전에 그 최종 단계 ㅡ 제국주의 시대 ㅡ에서 자본주의의 자태 변환은 “독점자본주의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전화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20세기의 진행 과정이 국가와 독점체의 구체적 관계는 세계적·일국적 발전에 따라 변화할 수 있고 실제로도 변화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여전히 자본가 국가와 독점체의 긴밀한 협력과 융합은 이 시스템의 핵심 특징으로 남아 있다. 자본주의가 깊은 위기와 쇠퇴/부후화 상태에 있는 현재와 같은 시기에는 더욱 그러하다.
배외주의적 국가 보나파르트주의로의 결정적인 전환
셋째,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사태발전과 관련하여, 우리는 배외주의적 국가 보나파르트주의로의 대대적인 전환을 보게 될 것이다. 이 범주는 두 가지 상호 연관된 특징들을 담아내고 있다. 하나는 국가 억압기구의 증강과 자본가 국가 최고기관들의 집행력을 강화하는 쪽으로의 전환이고, 다른 하나는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민족주의 및 특히 배외주의로의 방향 전환이다.
후자부터 말하자면, 가속화하는 강대국들 간 패권쟁투는 불가피하게 이미 배외주의가 팽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3차 대공황을 배경으로 더욱 창궐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미국과 중국이 코로나19 사태의 책임이 어느 쪽에 있는지를 두고 서로에 대한 비난을 증폭시키는 상황을 보고 있다. 트럼프와 백악관은 반복해서 “중국 바이러스” 운운하고 있고, 베이징은 “유행병을 우한에 가져온 것은 미군일 수도 있다”고 시사했다.
그러나 배외주의의 부상은 미국과 중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새롭게 부각되는 국경 문제와 각 지배계급이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국내에서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시도는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를 더욱 강화시킬 수밖에 없다. 오는 시기가 위기로 점철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러한 경향은 계속될 것이다.
억압기구 강화도 같은 맥락에서 진행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정부들이 글로벌 록아웃을 비롯한 그 밖의 여러 제한사항 준수를 통제하기 위해 거리에 많은 경찰들을 풀고 있다. 많은 반식민지 나라들에서 정부가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이용한다. 나아가 유럽과 북미의 제국주의 정부들도 그러한 국내 작전을 위해 군대를 배치하고 있다.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그 밖의 유럽 나라들에서는 수만 명의 군인들이 민간인들로부터 임무 인계를 받았다. 4월 6일 열린 EU 국방장관 회의에서는 이미 군 작전 조율이 논의되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증대되는 군국주의화에 대한 우리의 경고는 결코 과장된 불안 유포가 아니다. 미국의 영향력 있는 부르주아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는 위험평가 문서에서 코로나19 위기가 어떻게 발전할 수 있는지 3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 중 최악의 시나리오에서는 극적인 결과에 대해 경계령을 발하며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다. “사망률이 높아지고 경제위기가 심화됨에 따라 광범위한 폭력적 무질서가 격화되어 상당 병력의 미군 배치가 요구된다.” 이는 현 위기의 결과로 내란의 가능성이 이미 지배 서클들에서 현실적 옵션으로 논의되고 있는 상황을 반영한다!
이러한 사태발전은 주민 감시의 대폭적인 증가와 결합되어 있다. 많은 정부들이 현재 원거리 통신망을 통해 사람들의 움직임을 추적하고 있다. 중국은 주민 활동에 대한 모니터링을 돕는 인공지능과 같은 현대 기술 발전의 선진적 모델이다. 서방 정부들은 중국 따라잡기에 애쓰고 있다. 이런 국내 감시조치를 위해 드론과 소형 이동로봇을 거리에 배치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보다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우리가 <시국선언>에서 밝혔듯이, “일거에 '빅브라더'가 와버렸다. 공공연하게 말이다. 자본가 국가가 이를 감추려는 어떠한 시도도 할 필요 없이 말이다. 이 거대한 감시 기술이 곧 전 세계적으로 뉴 노멀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의회를 비롯한 그 밖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제도들을 희생시키면서 자본가 국가 최고기관들의 집행력을 강화시키는 과정도 본다. 정치적 위기 때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진면목이 보다 명료하게 드러난다. 부르주아 국가는 ㅡ 그것의 “민주적” 형태에서조차도 ㅡ 자본가계급 독재의 구현이라는 점을 맑스주의자들은 항상 강조하였다. 1919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1차 대회에 제출된 테제에서 레닌이 천명한 다음과 같은 내용은 여전히 유효타당하다. “부르주아 문명, 부르주아 민주주의, 부르주아 의회제도의 계급적 본질을 설명함에 있어 모든 사회주의자들은 맑스와 엥겔스가 최대의 과학적 정밀함을 가지고 정식화시킨 사상을 표현했다. 즉 가장 민주적인 부르주아 공화국도 부르주아지에 의한 노동자계급 탄압을 위한, 한줌의 자본가들에 의한 근로인민 탄압을 위한 기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상 말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그 같은 본질에 대해서는 부르주아 진영의 영리한 논자들도 의식해왔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독일의 유명한 우익 보수 정치 이론가인 칼 슈미트는 “주권자는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다”라고 적절하게 말한 바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정치체제의 전화가 트럼프, 존슨, 보우소나루 같은 인물들을 기능장애로 만든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런 사람들은 전략적 사고 능력이 결여된 반동 어릿광대와 모험주의자가 한 인물 속에 결합된 자들이다. 그들은 “이념적 총자본가”로서의 국가 (맑스)를 대표하고 이끌 수 있는 능력이 없고, 오히려 국가기구의 많은 부분을 상대로 끊임없는 파괴적인 전쟁을 벌인다. 그러한 인물들이 우리 앞에 있는 시기처럼 도전적이고 격동적인 시기에 자본가 국가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세계의 대부분 지역에서 전면 봉쇄 조치를 취한 현 국가비상사태 ㅡ 미국 언론인 데이비드 월러스 웰스가 <<뉴욕 매거진>>에 썼듯이 “일시적인 그러나 무기한의, 전시 같은 국가 벙커화(化)” ㅡ 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고 지속될 수도 없는 극단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글로벌 록아웃을 가져온 현 국가비상사태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불분명하다. 바하우딘 포이지와 같은 일부 지정학 분석가들은 이러한 조치를 매우 오랜 기간 동안 유지할 것을 제안한다. “바이러스가 주민 사이에 퍼지는 것이 완전히 멈추거나 백신이 광범위하게 사용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의무적인 봉쇄 조치를 ㅡ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라도 ㅡ 철회하는 것은 현명치 못할 것이다.”
어쨌든, 그러한 국가비상사태와 주민에 대한 통제 조치의 중요한 요소들은 장기간 동안 유지될 것이 분명하다. 팬데믹을 억제하고 예방한다는 명분을 엄폐물 삼아서 말이다.
실제로 우리는 이미 지배계급들이 주민 감시를 무기한 계속해야 할 “필요성”에 주민을 준비시키고 있는 것을 본다. 이것이 더욱 더 가능한 것은, 자본주의의 쇠퇴/부후화가 경제 위기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문명의 포괄적인 위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기후변화와 대규모 생태파괴가 인류에게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것도 그래서다. 급진적인 정치적·경제적 변화가 없다면 지구상의 인간 생명의 종말이 시작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코로나바이러스의 발생이 동물의 생물권 파괴가 확대된 데서 비롯한 간접 결과임을 보여주는 강력한 징표가 있다는 것을 명기해둔다.
일부 과학자들은 이미 몇 년 전에 이번과 같은 팬데믹의 가능성에 대해 경고했다. “팬데믹들의 발병이 해당 주민에게는 예상을 뛰어넘는 질병 건수의 증가로 나타나지만, 새롭게 부상하는 인간 감염 질병들의 특징은 그것들이 매번 ‘신종’ 질병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최근 진화를 겪은 질병들은 처음으로 인간에게 들어온 것이거나, 새롭게 발견된 것이다. 새로 부상한 감염 질병의 수와 마찬가지로 발병 건수도 전체 원인질환의 수에서나, 풍부함에서나 모두 인간 속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몇 주 동안, 연구자들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미치는 생태적 결과를 고려할 때 팬데믹들이 인류에게 커져가는 위험으로 계속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생태학자들은 코로나19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즉 인간에 의한 잠식과 기후변화로 인해 서식지 및 생물다양성 손실이 커지면서 초래된 대규모 팬데믹들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실로 기후변화와 환경파괴를 빨리 바로잡지 않으면 다음번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들이 지구상의 생명체를 훨씬 더 위태롭게 만들 것이다.”
“연구 결과, 에볼라, 사스, 조류독감, 그리고 지금의 코로나19와 같은 동물전염성 질병을 비롯한 그 밖의 전염 질병들의 발병이 증가세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병원균이 동물에서 사람으로 건너가고 있고, 많은 병원균들이 새로운 곳으로 빠르게 퍼질 수 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인간에게 감염되는 신종 질병 또는 새롭게 부상한 질병의 4분의 3이 동물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지배계급은 팬데믹의 위협을 억압기구 확대, 주민 감시, 국가비상사태의 무기한 연장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사용할 수 있고, 또 사용할 것이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지금 배외주의적 국가 보나파르트주의 체제 ㅡ 블룸버그 논평가의 말로 옮기면, “전능한 국가” ㅡ 의 형성을 보고 있다. 이러한 사태발전은 “제국주의는 민주주의의 부정이다”라는 레닌의 테제를 확인시켜 준다. 우리가 이미 과거에 지적했듯이,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역할 증대 ㅡ 제국주의 시대의 일반적인 특징 ㅡ 는 자본주의의 첨예한 위기와 쇠퇴/부후화 시기에 특히 두드러진다.
그러한 시기에 우리는 “군주제 나라에서만이 아니라 가장 자유로운 공화제 나라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억압 조치의 강도를 높이는 것과 연동된 ‘국가장치’의 비상한 강화 및 관료·군사 기구의 전례 없는 성장”을 본다. 그 결과는 강력한 기계장치의 탄생이다. 볼셰비키 당의 주요 이론가 니콜라이 부하린은 이 국가장치를 “뉴 리바이어던”이라고, “토머스 홉스의 판타지는 거기에 대면 어린애 장난감처럼 보이는” 그러한 뉴 리바이어던이라고 성격규정 했다. <시국선언>에서 우리가 내린 결론을 다시 한 번 보자. “이러한 제국주의 리바이어던이 지금 지배계급에 의해 ㅡ 팬데믹과 싸운다는 구실 하에 ㅡ 전속력으로 구축되고 있다. 제국주의 국가들에서의 상대적으로 폭넓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시대는 곧 끝날 것이다.”
독점 부르주아지는 의회제 내에 이미 존재해온 기존 제도들을 활용하여 보나파르트주의 지배 형태를 확립할 수 있다. 대통령, 군대, 경찰, 사법부 등의 역할, 각종 국가비상사태 법령들, 이 모든 메커니즘이 현 정치 시스템을 변환시켜 배외주의적 국가 보나파르트주의 장치를 구축하기 위한 지배계급의 임무를 단순화시켜준다. 1930년대 프랑스에 대한 트로츠키의 관찰은 그 적실성을 잃지 않고 있다. “모든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보나파르트주의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무엇이 “뉴 노멀”이 될 것인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전면 봉쇄가 종료된 이후의 부르주아 사회의 구체 상을 미리 그리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지배 서클들이 주민에 대한 통제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무엇을 바꿔내려고 계획하고 있는지 저들의 콘셉트에 대한 개괄적 윤곽을 그려보는 것은 가능하고 유용하다. 다음에서 우리는 기존 서방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들을 포함한 전 세계의 지배계급들이 현재 계획하고 준비하는 급진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몇몇 인용문을 제시하겠다.
영향력 있는 미국 외교협회 (CFR; 리처드 하스가 2003년부터 회장을 맡고 있다)의 전 회원인 그레그 C. 브루노는 아랍에미리트와 같은 반동 군주제를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이 좇아야 할 모범으로 칭송한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제기하는 위협에 대응하려면 전면적인 디지털 감시에서부터 보건의료 노동자의 징용에 이르기까지 이례적이고 심지어 위헌적이기까지 한 해결책이 필요할 수 있다....코로나19 이후의 시대에는 민주주의 국가들이 자유주의적 가치들을 버리지 않은 채 권위주의적 전술을 빌릴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아랍에미리트, 오만, 싱가포르와 같은 곳에서 이것의 한 버전을 보고 있다. 이들은 서구식의 자유분방한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다. 그러나 시민들은 높은 수준의 지적·문화적 개방성과 안전, 개인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AP통신의 한 보도는 중국에서 이미 가동되고 있는 (그리고 전 세계의 많은 자본가 정부들을 매료시키고 있는) 감시 기법의 성격에 대해 매우 유익한 통찰을 제공한다.
“코로나바이러스 발병 이후 중국에서의 삶은 스마트폰 화면의 녹색 코드가 지배한다. 녹색은 폰 사용자가 무증상임을 말해주는 "건강 코드"로, 지하철을 타거나 호텔에 체크인 할 때 필요하다. 또는 지난 12월에 팬데믹이 시작된 인구 1100만의 중심 도시 우한에 그냥 들어가는 데도 필요하다. 이 시스템은 중국 대중이 스마트폰을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고 집권 공산당이 "빅데이터"를 수용해 사회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넓힘으로써 가능해졌다. 의류 제조업체의 매니저인 우솅홍은 수요일 우한 지하철역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자신의 건강 코드 앱을 작동시킨 포스터의 바코드를 스캔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사용했다. 녹색 코드와 신분증 넘버 일부가 화면에 나타났다. 마스크와 고글을 쓴 경비대가 통과하라고 손짓을 했다. 만약 코드가 붉은색이라면, 그것은 경비대에게 우가 감염된 것으로, 또는 발열이나 다른 증상이 있는 것으로 확진을 받아 진단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노란색 코드는 우가 감염자와 접촉했는데 2주간 의무 격리 ㅡ 병원에 입원해 있거나 자가 격리에 들어가 있어야 하는 것을 뜻함 ㅡ 를 마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건 코드의 집중 사용은 노동자들이 공장, 사무실, 매장으로 다시 유입될 때 감염이 급증하는 것을 방지하면서 중국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한 당국의 노력의 일환이다....
옥스퍼드대 연구진은 화요일 사이언스 지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다른 정부들도 중국식 "디지털 접촉 추적"을 채택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연구진은 바이러스가 너무 빠르게 퍼지고 있어 전통적 방법으로 감염을 추적할 수 없지만, "이 과정이 보다 빠르고, 보다 효율적이며 규모 있게 진행된다면 통제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썼다. 일단 지하철에 탑승한 우솅홍과 다른 통근자들은 당국이 나중에 자신들을 찾아야 할 경우에 대비해 자신이 탄 전동차의 번호를 기록한 코드를 스캔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사용했다. 한 안내원은 "목적지까지 내내 마스크를 착용하고, 열차에서 내리기 전에 코드를 스캔해주세요"라고 적힌 배너를 들고 있었다. 좌석에는 승객들이 서로 충분히 거리를 두고 앉도록 점들이 표시되어 있었다.
우한에 있는 쇼핑몰과 사무실 건물과 그 밖의 공공장소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비슷한 통상적 절차를 거친다. 방문자들은 자신의 건강 코드를 보여주고, 마스크와 장갑을 착용한 경비대가 열을 확인한 다음 입장이 허가된다. 건강 코드는 중국 시민들이 공공장소, 온라인, 직장에서 무엇을 하는지 추적하는,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는 첨단 감시 매트릭스에 추가된다. 수백만 대의 비디오카메라가 주요 도시들에서 작은 마을들에까지 거리를 뒤덮고 있다. 검열관들이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상의 활동을 감시한다. 국영 통신사들은 휴대전화 고객들이 어디에 가는지 추적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회신용체계로 알려진 방대한 컴퓨터 시스템은 공식 룰에 대한 복종을 강제하기 위한 것이다. 중범죄에서 쓰레기 투기까지 법 위반으로 벌점이 너무 많은 사람들은 비행기 표 구입이나, 대출 또는 정부 일자리를 얻는 것이나 출국하는 것이 막힐 수 있다....
이 코드는 인터넷 대기업 텐센트의 인기 위챗 메시징 서비스와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 알리바바의 알리페이 전자결제 서비스를 통해 발급된다. 베이징청년일보에 따르면, 약 9억 명의 사람들이 위챗의 이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알리페이의 총 사용자 수는 보고된 것이 없다.... 규정에 따르면, 붉은색 건강코드로 여행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사회신용체계 상의 감점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 북동부 헤이룽장성 정부는 성명을 통해 "사기, 은닉 등의 행동"은 "그들의 미래 삶과 일에 큰 타격이 될" 처벌을 수반한다고 밝혔다.”
미국 경제학자 데이비드 P. 골드만도 중국 감시기술의 장점을 강조하면서 이 역시 서방 제약회사들에게 유망한 시장이라고 설명한다.
“중국은 재래식 공중보건 조치를 사상 최대의 정보기술 적용과 결합시켜 유행병을 막았다. 이러한 정보기술 적용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예상 보균자 위치 추적, 감염 가능성 있는 노드 식별, 14억 인구 상당수의 생명 징후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 하기, 개인의 검역을 규제하기 위한 스마트폰 앱 사용 등. 화웨이는 알리바바와 텐센트를 포함한 중국의 다른 거대 정보기술업체들과 경쟁하면서 정보기술의 의료 응용 분야에서 지배적인 세력으로 올라서는 데 수년을 보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중국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줄 기회를 제공했고, 그 결과는 놀라운 ㅡ 유럽의 모든 주요 제약회사들이 의료 분야에서의 이 공인된 차세대 대박 사업의 일부가 되고 싶어 안달할 정도로 놀라운 ㅡ 것이다.
중국은 지난 10년 동안 의료 분야의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및 그 밖의 정보기술 자원에 대규모 투자를 했기 때문에 코로나19에 대항하여 많은 디지털 자원을 결집해낼 수 있었다. 여기에는 디지털 화된 건강기록 ㅡ 구글이 하려다 미국 개인정보보호법 때문에 포기했던 ㅡ 부터 생명 징후를 판독하고 심전도를 촬영하는 스마트폰 부착장치, 이 생명 징후를 실시간으로 클라우드로 전송하는 스마트폰 앱, 대규모 DNA 시퀀싱, 5G 모바일 네트워크 기반 가상현실 헤드셋을 이용한 원격 수술, 진단과 약물 개발에 대한 인공지능 응용까지 망라되어 있다.
중국 데이터 과학자들은 이미 이용 가능한 방대한 양의 건강 정보를 스마트폰의 위치 데이터 및 광범위한 법의학 코로나19 검사 결과와 결합시켜 14억 주민 개개인 수준으로까지 위험을 식별했다. 이런 종류의 작업에서는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 코로나19 검사 결과는 종종 부정확하지만, 의료 당국이 인구 중 매우 큰 표본의 체온, 심박수, 혈액 산소 수준에 대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받으면 훨씬 더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자유주의 역사가 유발 하라리는 감시 기술의 놀라운 진보와 그 잠재적 위협을 매우 흥미롭게 묘사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당신의 손가락이 스마트폰 화면을 터치하고 링크를 클릭했을 때, 정부는 당신의 손가락이 무엇을 클릭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와 함께 관심의 초점은 이동한다. 이제 정부는 당신 손가락의 체온과 손가락 피부 아래의 혈압을 알고 싶어 한다.
감시기술과 관련하여 우리가 직면한 문제 중 하나는 우리 중 누구도 우리가 어떻게 감시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며, 앞으로 몇 년 사이에 이것이 어떻게 될 것인지 모른다는 것에 있다. 감시기술은 아주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10년 전에는 공상과학소설처럼 보였던 일이 오늘은 낡은 뉴스다. 한 가지 상상을 해보자. 모든 시민들에게 매일 24시간 체온과 심박수를 감시하는 생체 인식 팔찌를 착용할 것을 요구하는 정부가 있다고 치자. 이렇게 수집한 정보는 다시 정부의 알고리즘을 통해 다시 처리된다. 알고리즘은 당신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당신이 아프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당신에 어디에 있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도 알고 있다. 감염 확산을 획기적으로 막을 수 있고, 아예 확산 자체를 차단할 수도 있다. 이러한 시스템은 틀림없이 며칠 안에 전염병을 멈출 수 있을 것이다. 멋지지 않은가?
물론 단점은 이것이 무시무시한 새로운 감시체제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CNN 대신 폭스 뉴스를 클릭한다면 이것은 당신에게 나의 정치적 성향이나 성격까지 알려주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내가 어떤 동영상을 볼 때 나의 체온과 혈압 그리고 심박수가 어떠한지 감시할 수 있다면, 내가 언제 웃고, 언제 우는지, 언제 화가 나는 지까지 당신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분노와 기쁨, 지루함과 사랑은 감기나 열처럼 생물학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기침을 식별하는 기술은 웃음도 식별할 수 있다. 만약 정부와 기업이 우리의 생체정보를 대량으로 수집하게 된다면, 그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우리를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또한 그들은 우리의 감정을 예측할 수도 있고, 조작까지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팔고 싶은 무엇이든 우리에게 팔 수 있다. 그것이 상품이든 정치인이든. 생체정보를 이용한 감시는 케임브리지 애널리틱카의 데이터 해킹 전술을 석기시대의 것으로 보이게 할 것이다. 모든 시민이 24시간 생체인식 팔찌를 착용해야 하는 2030년의 북한을 상상해 보라. 위대한 수령의 연설을 듣는데 팔찌가 당신의 분노 감정을 식별하면, 당신은 그걸로 끝장이다.
물론 그러한 생체감시 기술을 비상 상황에서 임시 조치로 사용하면 되지 않겠냐고 되물을 수 있을 것이다. 비상사태가 종료되면 바로 중단하면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임시 조치는 대개 비상 상황이 종료되어도 지속하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 특히 지평선 너머에는 언제나 새로운 비상 상황이 잠복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의 고국 이스라엘은 1948년 독립전쟁 당시 비상사태를 선포하여 언론 검열과 토지 몰수에서부터 푸딩 제조 특별 규정까지 다양한 임시 조치를 정당화했다. 독립전쟁이 승리하고 난 다음에도 오랫동안 이스라엘은 결코 비상사태 종료를 선포하지 않았고, 1948년의 "임시" 조치 중 많은 것들이 폐지되지 않은 채 계속되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진자가 제로로 감소하여도, 데이터 수집에 굶주려있는 정부들은 2차 확산을 막기 위해 생체감시가 필요하다고, 또는 중앙아프리카에서 새로운 변종 에볼라가 진화하고 있다는 이유로, 또는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어떤 이유를 만들어내서 생체감시 시스템 유지를 주장할지도 모른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의 개인정보를 둘러싸고 큰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가 전투의 변환점이 될 수도 있다. 사람들에게 건강과 개인정보 중 양자택일하라고 한다면, 대부분 건강을 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적나라하게도 독점자본가들의 노골적인 대변 매체 블룸버그 통신도 이런 사태전개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권위주의 나라에서 인권 활동가가 어떻게 감시를 피할 수 있는지 중점적으로 연구해 온 사우스캐롤라이나 클렘슨 대학의 컴퓨터공학 교수 리처드 브룩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의 테러 방지 스파이웨어 전문 기술 회사는 코로나19로 알려진 보이지 않는 적의 확산을 늦추기 위해 12개국과 협력하고 있다. 중국 당국은 코로나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안면인식 소프트웨어와 위치 추적기를 배치했다. 그리고 정보기관과 연계가 있는 미국의 빅 데이터 회사는 자신들이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정부에 문의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비상권력은 빠르게 정상적인 운영 절차가 된다.... 전염을 막기 위해 사회적 접촉을 추적할 수 있는 능력이 만약 존재한다면, 반대파의 확산을 추적하는 데 그 능력이 사용될 것이라고 나는 장담할 수 있다...."
감시기술과 강력한 치안유지가 통합되어 있는 중국에서 코로나바이러스 환자의 신원 공개에 대한 비판이 일자 정부는 개인정보 보호 조치를 늘리겠다고 약속했다. 80만 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후용 신 미디어 비평가이자 베이징 대 교수는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공중보건 감시 전술 중 상당수가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침해했으며 본질적으로 불법"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생체인식 데이터 수집에 대해 시민들이 자기 결정권을 가질 수 있도록 허용하기로 합의했지만, 올해 하반기까지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경찰이 여전히 반정부 시위대를 단속하고 있는 홍콩에서도 정부의 과잉대응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3월 27일 당국이 새로운 사회적 거리두기 규정을 시행한 후, 경찰은 식당 주인들이 테이블을 1.5미터 간격으로 유지하고 한 테이블당 4명만 허용하도록 하기 위해 식당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빈과일보는 저명한 반체제 인사 아들이 운영하는 한 식당에서 경찰이 손님들의 이름과 신분증을 가져갔다고 보도했다. 정부는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이러한 강제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팬데믹이 사람들로 하여금 감시 권위주의 사회를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을 항상 우리는 우려하고 있다"고 말하는 시민운동가 갈릴레오 쳉은 트위터를 통해 경찰이 친 민주파 식당을 조준하여 사회적 거리두기 규정을 사용하려 한다고 경고했다. "이제 우리는 계엄령 식 법 시행의 제1단계에 들어섰다."”
지배계급이 앞으로 몇 달, 몇 년 동안 어느 조치들을 배치할 것인지 우리가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나아가 이것은 반동적 공격에 맞선 프롤레타리아트와 민중의 저항에도 좌우될 것이다. 그러나 부르주아지가 국가기구를 배외주의적 국가 보나파르트주의 쪽으로 전화시키고 싶어 한다는 것은 분명히 눈에 보인다.
예방 반혁명
지배계급이 어떻게 대량봉쇄 결정에 도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우리의 간략한 연대기에서 이미 말했듯이, 그것은 예방적 반혁명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지배계급은 전 세계 많은 나라들에서 대중투쟁이 진행되는 중에 이러한 공격의 파고를 높였다. 그러나 지배계급은 이 민중항쟁들이 완연한 혁명으로 전화하기 전에 그러한 공격을 감행했다.
우리는 이미 앞 장에서 지배계급이 일차적으로 팬데믹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계산속에서 국가비상사태와 국가 보나파르티즘을 집어 들었다고 설명했다. 다양한 부르주아 정치가와 관측자들이 이 사실을 간접적으로 내비치기도 했다.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높아진 불안정과 소요, 분쟁”의 위험을 명시적으로 언급했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에게 이번 바이러스로 촉발된 비상한 격변은 지난 수십 년간 세계가 보아온 상대적 평화에 실질적인 위험을 안겨주는 것이다. 이 질병은 "세상 모두에게 위협이자... 최근 과거 동안 아마도 유례가 없는 불황을 가져올 경제적 충격"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 두 가지 사실의 결합과, 이 결합이 높아진 불안정과 높아진 소요, 높아진 분쟁에 미칠 위험 때문에 우리는 이 상황이 2차 세계대전 이래 우리가 직면한 가장 도전적인 위기라고 믿지 않을 수가 없다."”
지배계급 관점에서의 이러한 고려는 특히 안드레아스 클루트의 기사에 잘 나타나 있다. 클루트는 현재 블룸버그 편집위원으로 독점 부르주아지 내 대표적 논자이며, 그 전에는 독일의 유수 자본가 신문 한델스블라트 글로벌의 편집장이자 이코노미스트의 논설위원이었다. 이 주의 깊은 부르주아 관측자는 지배 서클들이 코로나19 위기 이전 기간 계급투쟁의 극적인 상승과 이 위기의 폭발적 결과를 십분 인식하고 있었다는 우리의 분석을 확인시켜 준다.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가장 그릇된 상투적 논리는 그것이 우리 모두를 똑같이 취급한다는 주장이다. 의학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그렇지 않다. 특히, 코로나19는 그것이 다다르는 곳마다 기존의 불평등 상태를 더 악화시킨다. 머지않아, 이것은 봉기와 혁명을 포함하는 사회 대란을 야기할 것이다.
코로나19가 그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전 세계적으로 소요가 증가하고 있었다. 한 집계에 따르면 2017년 이후 프랑스와 같은 부유한 나라의 질레 조누(노란 조끼) 폭동부터 수단, 볼리비아 등 가난한 나라의 독재자에 대한 시위까지 약 100건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있었다. 이러한 봉기 중 약 20건이 지도자를 실각시킨 반면, 몇몇 봉기는 잔인한 탄압으로 진압되었고 그 밖의 많은 봉기들이 폭발 직전 상태로 돌아가 다음 번 터질 때까지 부글부글 끓고 있다.
코로나19의 직접적인 결과는 민주 정부와 권위주의 정부 모두 강제로 주민들을 록다운 시킴으로써, 즉 사람들이 거리로 나가거나 단체로 모이는 것을 막음으로써 소요의 기세를 꺾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격리된 가정의 문 뒤에서, 길어져 가는 무료급식소 앞 대기줄에서, 교도소와 빈민가와 난민수용소에서 ㅡ 이미 발병 전부터 사람들이 배고프고 아프고 한숨 쉬던 곳에서 ㅡ 비극과 트라우마가 쌓여가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이런 압력은 분출될 것이다.”
또 다른 부르주아 경제학자도 자본주의 체제의 현 위험에 대한 비슷한 인식을 표현했다.
“중국 우한에서 처음 보고된 코로나바이러스가 국경을 가로지르는 대규모 이동으로 인해 이제 170여 개국으로 확산되었다. 뒤따른 패닉이 잘못된 정보의 확산을,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사회질서 붕괴의 시작을 ㅡ 서방 국가들의 약점들이 모두의 눈에 분명해지면서 ㅡ 가져왔다. 주민들이 잘못된 정보와 패닉 상태에 빠지기 쉽고 부족 상태에 직면할 수 있는 나라들의 정부한테는 국가 안정에 대한 위협이 매우 현실적이다. 바이러스가 본성상 차별적이라서 주로 많이 아픈 사람들과 고령자들에게 영향을 끼치지만, 온 세상을 들썩한 것은 사실이다. 우리의 시스템이 취약하기 짝이 없고 너무 쉽게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최근 발표한 기사에서 우리는 지난 10년 동안의 대규모 시위의 발전에 대한 통계적 개요를 제시한 부르주아 싱크탱크의 새로운 연구에 주목을 요한 바 있다. 그들 부르주아 싱크탱크는 대중시위가 “세계의 모든 주요 인구 밀집 지역에 영향을 미치는 10년간 추세선의 일부”라고 결론지었다. 그들은 아랍 혁명이 지난 10년간 글로벌 대중시위 물결의 방아쇠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편, 자신들이 다루고 있는 것이 지역적 현상이 아니라 글로벌 현상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넓은 맥락에서 볼 때, 아랍의 봄 사태는 고립된 현상이 아니라, 광범위에 걸쳐 증가하던 글로벌 추세의 특히 첨예한 표현이었다.” 이 연구의 저자들은 또 지난 10년을 그 이전 지난 반세기 동안의 사태발전과 비교하며, 최근 역사에서 우리가 이전보다 훨씬 더 의미심장한 봉기 물결을 경험했다고 결론 내린다. “최근 시위의 규모와 빈도는 1960년대 말,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와 같은 대중시위 시대들의 역사적 예들을 무색케 한다.”
우리는 맑스주의자들이 이 모순적 발전을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우리는 현대사에서 (적어도 1945년 이후) 가장 큰 폭의 대중투쟁 상승 물결을 경험했다. 그래서 전 세계의 지배계급들은 깊은 걱정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혁명적 리더십의 결여 속에서 이 대중항쟁들은 대중이 권력을 잡아보고자 하는 실제 무장봉기 단계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 대중은 무장봉기 없이 전진하는 길이 있을 것 같은 각종 환상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이 글로벌 대중투쟁 물결에 관한 논문에서 우리는 “인민대중이 뒤떨어진 의식을 가지고 전투에 들어가고 있”고, 여전히 많은 “순진한 희망”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했다.
최근 민중항쟁 물결의 대규모적 성격과 전 세계적 확산으로 볼 때, 우리는 지배계급의 국가 보나파르트주의로의 전환이 훨씬 더 공격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통치 형태를 꺼내드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방어적이고 예방적인 성격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역사적 유추의 한계를 십분 인식하는 가운데, 우리는 현 상황에 유효 적실성이 있어 보이는 레닌의 두 가지 사상을 참고하는 것이 유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1907년 6월 3일 스톨리핀 쿠데타 직후 볼셰비키 당의 리더는 당시 러시아의 정세를 다음과 같이 성격규정 했다. “러시아의 현 정세는 간신히 봉기를 억누른 정세다.” 어느 정도 이것은 우리에게도 글로벌 계급투쟁 현주소에 대한 유용한 묘사로 보인다.
그리고 현 세계정치정세를 이해하는 데 유용할 수 있는 또 다른 유추를 참고해보자. 1917년 7월 러시아에서 케렌스키 정부는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들의 자연발생적인 봉기에 대응하여 보나파르트주의 쿠데타를 감행했다. 이 성공적인 반혁명으로 부르주아 보나파르트주의 체제가 성립됐다. 레닌은 이 새로운 지배체제에 다음과 같은 성격규정을 부여했다. “보나파르트주의는 민주 변화와 민주 혁명의 조건 속에서 부르주아지의 반혁명적 본질에서 성장해 나오는 통치 형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볼 때 이러한 성격규정과 현 정세와는 어떤 유사성이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또 현 사태발전의 특수성과도 관련이 있다. 현 정세의 비상함은 현 정세가 자본가 국가의 비상한 대규모 정치 개입에 의해 촉발되었다 ㅡ 그러한 개입이 현 정세를 야기한 ‘원인’은 아니지만 ㅡ 는 데 있다. 이것이 기획 조정 속에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국가에 의한 그러한 개입은 처음에 두 지배적 제국주의 강대국 중 하나에 의해, 이어서 서유럽 정부들에 의해 실행되었고, 그 다음에 세계의 나머지 나라들이 이 대열에 합류하였다. 그것은 중국에서 시작하여 몇 주 안에 전 세계를 사로잡는 글로벌 연쇄반응이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제쳐두고 본다면 현 사태발전은 확실히 가장 글로벌화 된 세계정치정세다. 즉 서로 다른 대륙에서의 사태발전이 현대사의 여타 어느 정세보다도 더 직접적이고 가시적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는 정세인 것이다.
이와 같이, 경제공황이 코로나19 위기를 원인으로 해서 야기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 의해 심화되고 확대 고조된 것은 확실히 맞다. 그러한 이유로 지배계급들은 이 경제위기를 그것의 진정한 원인 ㅡ 자본 과잉축적과 이윤 저하 ㅡ 에 의해 설명하려 하지 않고, 코로나바이러스에 의해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이 경제위기는 과거 공황들보다 훨씬 더 정치적인 성격을 가진다. 그리고 이 이유로 대중적 증오는 공황에 책임이 있는 자들로서 (익명의 “시장의 힘” 대신) 보다 쉽게 부르주아 정부를 향해 조준될 것이다.
우리는 반혁명 공세의 현실성을 과대평가하는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한 아르헨티나 조직의 동지들이 RCIT의 정세평가에 반대하여 제기한 비판을 다루고자 한다. PST 쇄신 그룹은 코로나19 위기에 대한 성명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가 "세계 반혁명 공세" 하에 있으며, 그것이 세계와 우리나라에서 계급 역관계를 바꿔놓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ㅡ 일부 좌파 조류들이 군대가 거리에 개입하고 대량봉쇄 조치가 실시되고 있다며 주장하고 있듯이 ㅡ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분석이 완전히 틀렸다. 지난해 전체가 홍콩에서 에콰도르, 칠레, 푸에르토리코를 거쳐 카탈루냐로, 이라크와 이란에서 아이티로 이어지는 혁명적 물결로 두드러졌다. 이 혁명들은 자본가 정부와 그들의 계획을 맹렬히 타격하며 전진했다. 팬데믹의 영향은 자본주의와의 싸움을 조정하고 조직할 수 있는 국제 리더십을 가지지 못한 대중에게 한순간의 혼란을 낳았다. 그러나 자본가 정부들이 한 일은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것처럼 혼란의 첫 순간에 편 책략들이 다다. 여기 우리나라에서나 세계에서나 대중이 패배한 것은 없다. 그 반대다.”
우리는 이 동지들이 사회보나파르트주의 록다운 좌익과는 대조적으로 부르주아 정부의 반동적 공세에 대한 일체의 기회주의적 투항을 거부하고 있는 것을 강력히 환영한다. RCIT처럼, 이 동지들도 글로벌 록다운과 군사화 등 이들 자본주의 정책을 비난한다. 이와 같이 이 동지들과 우리는 중요한 공통 지반을 공유하고 있고, 따라서 더욱더 이 동지들의 비판을 진지하게 취급할 용의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동지들의 비판이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먼저 RCIT가 <시국선언>에서 이 문제에 대해 천명한 내용을 요약해 보자. “우리가 위에서 말했듯이, 글로벌 코로나19 위기는 세계정세의 중대한 전환점이다. 이미 코로나19 위기로 인해, 2019년에 시작한 계급투쟁과 인민항쟁들이 대폭 가라앉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다고 이러한 투쟁들이 끝났다든 뜻은 아니다. 칠레, 이라크, 알제리, 프랑스, 홍콩의 노동자와 청년들의 여러 대담한 시위들이 보여주듯이 말이다. 러시아-이란-아사드 점령군에 대항하여 이들리브에서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시리아 인민의 영웅적인 해방투쟁은 또 다른 예다. 그러나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쥔 자본가국가 리바이어던이 그 힘을 증강함에 따라 이들 항의시위도 크게 축소되고 있는 것이 전반적인 상황이다. 이것은 준혁명적 정세가 지금으로선 마감하고 글로벌 반혁명 정세가 열렸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의 의견으로는 이러한 기본 사실들을 부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칠레, 이라크, 프랑스, 홍콩 등에서 대중시위는 대폭 줄었다가 적어도 현재는 대부분 소멸했다. 이것은 그 자체로 투쟁의 중대한 후퇴로서, 이 나라들 모두에서 매주 정기적인 대규모 시위가 있었던 수개월의 기간 뒤에 심각한 퇴조를 맞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혁명가들이 이 예방 반혁명의 본질을 무시하는 것은 오류라고 본다. ILO의 가장 최근 연구에 따르면 전 세계 노동인구의 약 81%인 27억 명의 노동자들이 현재 전면적 또는 부분적 봉쇄 조치로 타격을 입고 있다. 그들은 중상위소득 국가 노동인구의 87%와 고소득 국가 노동인구의 70%에 해당한다.
현 정세는, 동지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리고 우리도 여러 차례 말했듯이, 전 세계의 부르주아 정부와 그들의 언론매체가 퍼뜨리고 있는 공포와 마비 효과로 인한 대중의 혼란이라는 중요한 요소를 담고 있다. 그러나 반혁명을 특징짓는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국가기구의 비상한 동원 ㅡ 국가비상사태, 거리의 경찰과 군대, 정권에 예외적인 권력 부여 등 ㅡ 도 반혁명의 중요한 특징을 이룬다. 요컨대, 우리가 위에서, 그리고 다른 문서들에서 강조했듯이, 배외주의적인 국가 보나파르트주의로의 대대적이고 전례 없는 전 세계적 전환, 명백히 이것은 코로나19 위기를 틈탄 지배계급의 반혁명 공세로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은 중대한 반혁명적 힘의 동원·결집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부르주아 질서의 심각한 위기를 반영한다. 제국주의 서구 나라들의 지배계급이 상대적으로 확대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지형을 떠나 국가 보나파르트주의로 넘어가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완전히 청산하지는 않은 채) 것 말고는 대안이 없는 것은 다름 아닌 자본주의 체제의 쇠퇴/부후화 ㅡ 1929년 이후 최악의 공황과 가속화하는 강대국 간 패권쟁투와 글로벌 계급투쟁 물결 등으로 표현된 ㅡ 때문이다.
이러한 사태발전을 인정하는 것은 “비관주의”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그것은 계급 역관계와 노동자 전위의 임무에 대한 현실적인 평가의 일부다. 그것은 혁명가들이 활동의 상당 부분을 비합법 조건 하에서 수행해야만 하는 시기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나아가 혁명가들은 그러한 국가 보나파르트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투쟁을 위해 노동자 전위를 정치적으로 준비시켜야 한다. 여기에는 민주적 요구들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 민중봉기를 준비할 필요를 설명하는 것 등등이 포함될 것이다.
비관적으로 우리가 그 어떤 계급투쟁 가능성도 없는 반혁명 '장기 암흑기'를 예견하는 것이라고 동지들은 우려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말하는 것도, 의도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RCIT는 정반대를 말하고 있다. 우리는 <시국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물론 다른 유형의 반혁명적 정세도 존재한다. 부르주아지가 노동자·민중 조직들을 박살내고 투사·활동가 층 전체를 파괴하는 반혁명 정세가 있을 수 있는데, 예를 들어 1907년 6월 스톨리핀 반동 이후의 러시아, 1933년 독일, 1973년 칠레, 2013년 7월 3일 군사쿠데타 이후의 이집트가 그런 경우다. 이들 반혁명 공격의 결과로 노동자계급의 전략적인, 심지어는 역사적인 패배가 초래된 경우들이다. 현 정세는 그와는 많이 다르다. 우리가 지금 목도하는 반혁명 공세는 팬데믹에 대한 대응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어 노동자·민중 운동의 상당 부문들을 혼동에 빠뜨리고 있는 그러한 공세다. 그것은 글로벌 대중투쟁 물결의 일시적 퇴조와 함께 억압적 국가기구의 대대적인 강화로 특징지어지는 공세다. 따라서 계급투쟁의 일시적 정체로 크게 누적된 모순이 조만간 대대적인 정치적 폭발로 결과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정세가 얼마나 오래 지속할지는 예견할 수 없다. 단 몇 개월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배계급의 반혁명 공세가 폭발적인 정치적 모순을 낳을 것이라는 것이다. 국가 보나파르트주의 정권들이 민주적 제 권리에 대한 자신들의 대대적인 공격을 정당화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들이 대자본가들에게 수십, 수백억 달러 씩 퍼주기를 하는 동안 많은 노동자들이 해고와 임금삭감을 맞는 상황이 누구의 눈에도 명백히 들어올 것이다. 이탈리아에서의 몇몇 파업, 또는 봉쇄 격리된 사람들이 발코니에 나와 박수치고 노래 부르며 서로를 격려하는 모습들은 제한적인 것이지만 전도를 보여주는 사태발전의 예들이다. 또 강대국들 간의 대대적인 글로벌 긴장 고조도 불가피하다. 달리 말하면, 글로벌 반혁명 공세는 계급 간, 국가 간 가속화하는 정치·경제적 모순을 단지 일시적으로만 덮어 가릴 수 있을 뿐이다. 조만간 이것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대대적인 정치적 폭발로 결과할 것이다. 남반구에서, 그리고 제국주의 국가들에서 모두 심대한 국내 위기의 형태로, 전쟁과 혁명적 봉기의 형태로 폭발할 것이다.”
우리는 이 평가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말했듯이 계급투쟁의 역사는 다양한 유형의 반혁명적 정세를 알고 있다. 케렌스키가 1917년 페트로그라드에서 7월의 날들의 패배 이후 부르주아 보나파르트주의 정권을 수립했을 때도 반혁명적 정세가 존재했다. 하지만, 잘 알려진 대로, 이 정세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고, 10월에는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요약하면, 현 반혁명 공세가 지배질서에 대한 대중적 증오를 일시적으로 억누를 수 있을 뿐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난 민중항쟁 물결 ㅡ 팬데믹 이전의 ㅡ 은 ‘순진한 희망’을 특징으로 했다. 그러나 현 사태 ㅡ 경제파탄과 팬데믹과 국가 보나파르트주의의 결합 ㅡ 는 불가피하게 대중을 급진화 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많은 환상이 깨지고 절박함이 커질 것이다. 자본가계급 자신들도 이것을 알아채고 “뉴 노멀”, 즉 뉴 리바이어던을 수립하려고 하는 것 같다. 이 자본주의 괴물에 대항하여 대중투쟁에 정세전망을 제공하고 투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 혁명가들의 임무다.
3장. 뉴 리바이어던 시기 혁명 전략의 기본 원칙
위의 서론에서 이미 밝혔듯이, 이 책은 그 자체로 목적인 학술적 작업이 아니다. 코로나19 위기를 엄폐물 삼은 반혁명 공세에 맞서 계급투쟁을 위한 정세인식과 전략·전술을 명확히 하기 위한 하나의 기여다. “맑스주의는 그 핵심 정수에서 혁명적 행동을 위한 일련의 방침이다”라는 트로츠키의 격언은 그 어느 때보다도 현실성을 가진다. 그리하여 맑스주의적 분석이 현 시기 혁명적 투쟁에 어떠한 결론을 가져오는지 논의하는 것이 긴급히 필요하다.
현 3중 위기가 혁명가들에게 비상한 도전을 던지고 있다는 것은 의심이 있을 수 없다. 노동자계급과 피억압자는 1929년 이후 최악의 경제공황의 결과들을 온몸으로 맞고 있다. 동시에 부르주아 국가의 억압기구가 동원되고, 인민은 글로벌 록다운 때문에 집에 머물도록 강제되고 있으며, 집회와 시위가 전 세계에 걸쳐 수많은 나라들에서 금지되고 있다. 그리고 이와 병행하여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의 두려움 아래 살고 있다. 의심할 바 없이, 이것은 자본주의 반혁명 정치 쓰나미다!
이 반동적 공격에 맞서 싸우기 위한 전략을 발전시키는 것이 혁명가들의 으뜸가는 임무다. 이를 위해 우리는 혁명적 노선의 중심축을 정확히 세울 수 있도록 반혁명 노선의 중심축이 무엇인지 규명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정치 반혁명은 맑스주의자들에 의한 정치 전략을 요구한다.
앞 장들에서 설명했듯이 3개의 재난 ㅡ 3차 대공황, 리바이어던, 팬데믹 ㅡ 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 영역 각각이 맑스주의자들의 강령적 대응을 요구한다. 따라서 혁명적 행동강령은 경제·정치·보건 요구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팬데믹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혁명가들은 자본가계급의 무능과 계급적 편협성과 싸우기 위한 일련의 요구를 제출해야 한다. 우리의 <보건 행동강령>에서 제시했듯이 (본서의 부록 참조), 그러한 일련의 요구는 무료 대량검사, 감염자에 대한 격리 및 위중한 경우 병원 무료 접근, 노동자 통제 하에 공중보건 부문 확대, 백신 개발을 위한 국제 협력 프로그램, 노동자 통제 하에 제약산업 몰수 등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또 쏟아지는 경제적 공격에 대항하는 투쟁은 해고, 노동조건 악화, 임금삭감 등에 반대하는 요구와, 노동자통제 하에 기업 몰수, 부자들에 대한 과세에 의해 자금을 조달하는 공공 고용 프로그램 등, 이러한 일련의 요구들을 그 중심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민주적 제 권리에 대한 공격에 대항하는 투쟁은 록다운, 집회·시위 금지, 경찰·군대의 비상권력, 감시체계 구축 등에 반대하는 요구가 필요하다.
요컨대, 3대 재난은 혁명가들에게 이 3대 영역 ㅡ 경제·정치·보건 요구들 ㅡ 을 모두 다루는 전략 수립을 요구한다. 그리고 올바른 전술 과제를 도출하기 위해 이 세 영역의 내적 배치를 확인하는 것이 가능하고 실로 필요하다. 우리가 위에서 지적했듯이, 전 세계 지배계급들의 가장 중요한 공격 방향을 대표하는 것은 정치 반혁명, 즉 배외주의적 국가 보나파르트주의로의 전환이다.
정치적, 반민주적 공격으로 노동자계급과 민중이 결집하고 단결하고 권리를 위해 싸울 가능성이 금지, 억압되고 있다. 사업장이 폐쇄되지 않은 지역에서는 노동자들이 시위와 파업을 할 수 있다 ㅡ 그리고 일부 경우에 실제로 했다 ㅡ 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규모로 조직하고 싸우는 것은 현 반민주적 공격에 의해 사실상 전부 금지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정치적 공격은 급증하는 해고와 임금삭감에 대항하는, 그리고 더 나은 보건의료 프로그램을 위한 노동자·피억압자의 투쟁 능력을 대폭 저하시킨다. 사회적 쟁점이나 보건 쟁점에 대한 민중들의 그 어떤 진지한 투쟁도 기본적인 민주적 권리를 억압하는 정치적 법령들과 즉시 충돌할 것이다. 따라서 반동 리바이어던에 도전하는 정치적, 민주적 요구를 동시에 제기하지 않고는 경제나 보건 분야에서 그 어떤 진지한 ㅡ 위선적이지 않은 ㅡ 요구도 제기할 수 없다.
실제로 현 위기에 대응하는 자신들의 프로그램 (강령)에서 이 같은 접근법을 세우는 데 실패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현재 대부분의 개량주의·중도주의 세력들의 결정적인 특징이다. 그들은 더 나은 건강 보호 대책에서부터 임금삭감·해고 반대까지 일련의 요구들을 열거한다. 당연히, 모든 요구 하나하나가 진보적이고 필요한 요구다. 그러나 이러한 대부분의 강령들에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빠져 있다. 록다운 종식 요구, 집회·시위 권리 요구, 경찰국가/감시국가의 모든 측면에 반대하는 요구 말이다.
그러나 이 초보적인 결함은 그러한 강령들을 자본가와 그들의 정부에 대한 애처로운 구걸 편지로 전화시킨다! 노동자계급이 위기 때에 자본가들을 대중투쟁 없이 어떻게 양보하도록 강제할 수 있을까? 노동자계급이 온라인 탄원서를 통해 “싸울”까?! 이런 초보적인 진실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 당혹스럽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개량주의·중도주의 좌익들은 이것을 잊어버린 것 같다! 대중없이 “싸우는” 그런 개량주의적인 전략은 “무릎 꿇고 반항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 그것은 아예 “엎드린 채 반항하는” 것이다!
레닌은 충격적인 역사적 사건이 사회주의자들의 의식에 깊은 혼란과 사고의 억눌림을 초래할 수 있다는 생각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가 이러한 생각을 표명한 것은 1차 세계대전 연간이었다).
“전쟁 때문에 사고가 억눌리고 전쟁의 끔찍한 인상과 고통스러운 결과나 양상의 무게에 짓눌려 판단과 분석을 중단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러한 “사고의 억눌림”은 맑스주의 전략 내 민주주의 투쟁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실패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키에프스키가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할지라도, 바로 이것이 그의 모든 불행의 진정한 근원이다. 바로 이것이 그의 기본적인 논리상의 오류다. 이 오류는 그것이 기본적인 것인데다 저자가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펑크 난 자전거 타이어처럼 매 걸음마다 ‘터져나온다.’ 이때는 조국 방위 문제에서, 저때는 이혼 문제에서, 또 이때는 ‘권리’에 대한 언급 가운데에서, ‘권리’가 문제가 아니라 해묵은 노예 제도의 파괴가 문제라고 하는 멋진 (‘권리’에 대한 심한 경멸로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심한 무능력으로나 어느 모로나 멋진) 언사 속에서 그 오류는 ‘뜻하지 않게 튀어나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언사는 그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민주주의 강령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 같은 실패야말로 현 시기 대다수 좌파들의 거대한 실패의 중심 특징이다. 그러나 실로 맑스주의자들이 현 조건에서 리바이어던 반혁명에 대항하는 투쟁을 ㅡ 즉 정치적, 민주주의적 투쟁 ㅡ 선전·선동의 중심에 두지 않고서 계급투쟁을 촉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록다운 정치에 반대하는 정치적 투쟁을, 반 리바이어던 투쟁을 수행하는 데 실패하는 것은 사실상 계급휴전 정치를 지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 단계에서 자본가 국가에 의한 정치적 억압에 공공연하게 도전하지 않는 것은 사실상 현재의 집회·시위 금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현재의 집회·시위 금지를 받아들이는 것은 사실상 계급휴전 정치, 즉 개량주의적 투항 정치에 동의하는 것이다.
팬데믹 때 계급휴전 정치는 공중보건 방어를 위한 우리의 투쟁을 약화시킨다
이와 밀접하게 관련된 다음 문제로 나아가보자. 공공연하게든, 위장한 채로든 록다운 정책을 지지하는 많은 좌파들은 자신들이 민주적 권리 금압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지 일시적인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포스트-코로나19” 시기에는, 즉 현 팬데믹의 일정 조건들이 끝날 때는 이러한 권리를 위해 싸울 것이라고 약속한다. 확실히, 몇몇 경우에 이러한 주장은 기회주의적 투항의 구실에 불과하고, 다른 경우에는 정치적 혼란의 솔직한 반영이다. 투항주의자들과는 토론이 아니라 싸움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돌발적이고 일순 세상을 마비시키는 듯한 글로벌 사태에 압도되어 혼란스러워 하는 동지들과는 토론하고, 희망컨대 설득하고 싶다.
우리는 이러한 대중투쟁 일시 중단 정치를 위험한, 그리고 스스로 무장해제 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첫째, 민주적 권리를 방어하는 것이 예방 조치들 (손 씻기를 비롯한 그 밖의 표준 위생 조치들, 마스크 착용 ㅡ 세계보건기구는 마스크 착용에 대해 아플 때를 제외하고는 필요하지 않다고 여겼지만 ㅡ , 서로 간에 일정 거리를 유지하기 등등)과 병행될 수 있고 또 병행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둘째, 거리로 나오는 것은 자신을 죽이는 것이라는 부르주아 히스테리 선무행렬에 합세하는 것은 우스운 짓이다. 며칠 전 과학자들은 코로나바이러스의 치사율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연구는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간겔트 시에서 수행되었는데, 이 간겔트 시는 일종의 “독일 우한”으로, 본서 집필 시점에 독일에서 감염률이 가장 높은 지역 (주민의 약 15%)이었다. 연구 결과, 전체 감염자 수를 기준으로 한 치사율이 0.37%로 나왔다.
셋째, 반복해서 말했듯이, 이 바이러스가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을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2009년 H1N1 팬데믹 (“돼지 독감”)이 전 세계적으로 28만4천명의 사망자를 낸 것으로 추정했다. 세계보건기구는 매년 25만 명에서 50만 명이 계절성 독감으로 사망하는 걸로 추산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더 심해질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아마도 우리는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다. 그러나 독재로 나아가는 조치들에 반대하며 민주적 권리를 방어하는 문제는 팬데믹의 심각성에 달려 있지 않다. 과거에 20만 명이나, 30만 명, 또는 50만 명이 각종 팬데믹으로 죽었을 때 세계 어느 누구도 감히 민주주의를 문제 삼지 못했다. 왜 사회주의자가, 또는 민주주의자가 코로나19 위기를 맞은 2020년에는 다른 접근법을 취해야 할까?! 50만 명이 팬데믹으로 죽을 때는 민주주의를 방어하지만, 그 보다 두세 배가 죽을 수도 있을 때는 부르주아 독재를 지지한다? 이것이 용인될 수 있는 일인가?! 다시 묻는다. 혁명가들이 아프리카에서 팬데믹이 많은 사람들을 죽일 때는 민주적 권리를 옹호하는 챔피언이 되지만, 그러한 팬데믹이 유럽과 북미에 이를 때는 부르주아 국가비상사태 체제의 지지자가 된다? 이것이 용인될 수 있는 일인가?! 이것은 노동귀족-배외주의적 위선을 비추는 것이 아닌가?! 이 질문들에 대한 올바른 답을 모른다면, 맑스주의자도, 사회주의자도, 심지어는 민주주의자도 아니다!
넷째, 팬데믹 때 계급투쟁을 중단, 연기하는 것은 생활수준을 방어하고 나아가 생명을 구하기 위한 조건을 개선은커녕 오히려 악화시킬 것이다. 자본가계급은 권위주의적 국가기구를 확대하기 위해, 사업장을 폐쇄하고 노동자를 해고하기 위해, 가혹한 긴축 프로그램을 준비하기 위해 현 록다운을 이용한다. 이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공중보건 부문을 약화시킬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물질적·위생적 생활 조건도 타격할 것이다. 이와 같이 자본가계급이 권좌에 더 오래 머물수록 반동적 프로그램을 밀어갈 시간이 자본가계급에게 더 많아지며 민중의 생활 및 보건 조건은 더 위험해진다.
다섯째, 계급휴전이 팬데믹과 싸우기 위한 조건을 개선시킬 것이라는 생각은 지배계급에 대한 완전히 어이없는 신뢰를 드러낸다. 어째서 자본가 지배계급이 팬데믹과 싸우는 데 더 유능하다는 것인가?! 왜 노동자계급과 농촌·도시 빈민이 진보적인 과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할 수 있는 것보다 자본가계급이 더 잘할 거라고 가정해야 하는가?! 코로나19 팬데믹에 대항하는 투쟁은 지금 솟아나오고 있는 반동적 국가 보나파르트주의에 대항하는 혁명적 민주주의 투쟁과 병행될 수 있고 또 병행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모험주의인가, 체계적인 준비인가?
우리는 혁명적 맑스주의의 안티 팬들이 대중이 거리에 나와 싸우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우리의 정책은 모험주의적이고 초좌익적이라며 반대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모든 면에서 어리석은 논리다. 첫째, 결정적인 문제는 혁명가들이 전위와 대중에게 무엇을 말하느냐다. 혁명가들은 록다운 정책이 반동적이라고 설명하는가? 혁명가들은 노동자·피억압자가 부르주아 국가를 신뢰해서는 안 되며, 배외주의적 보나파르트주의 국가를 무너뜨리기 위해 조직하고 투쟁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설명하는가? 아니면 노동자·피억압자가 록다운을 지지해야 하는가, 안됐지만 록다운을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 계속 침묵한 채로 있어야 하는가? 이것이 현 시기에 결정적인 질문이다! 처음부터 RCIT는 지배계급의 반동적 공세의 실체를 대중에게 밝혀주고 록다운 정책에 반대해야 한다고 대중에게 설명하는 경우에만 혁명적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강조해 왔다. 오직 대중의 의식에 대한 구체적인 평가만이 거리의 투쟁을 촉구할 때가 왔는지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해야 할 일은, 록다운 정책에 맞서 거리에 나와 싸우지 않으면 또 한 번 후퇴를 맞을 것이기 때문에 록다운에 반대하여 싸우는 것이 필요함을 대중에게 설명하는 것이다.
우리의 접근법은 1차 세계대전 초기 국면에서 레닌과 볼셰비키가 취했던 것과 같다. 즉 제국주의 전쟁의 내란으로의 전화를 요구하는 비타협적인 혁명적 노선에 깔려 있는 방법 말이다. 레닌은 1915년 제1차 치머발트 회의에 관한 글에서, 즉각 실행될 수 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프롤레타리아트가 해야 할 것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각국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떠한 속도로, 어떠한 방식으로, 어떤 특수한 형태로 혁명적 행동에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회의에서 제기된 바 없으며, 또 제기될 수도 없었다. 이를 위한 조건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다. 현재로선 올바른 전술을 공동으로 선전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며, 운동의 템포와 큰 흐름 내에서의 (민족별, 지역별, 직종별) 변형을 정하는 것은 그때그때 사건들에 맡겨둬야 한다.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나키즘적 언사에 의해 타락했다고 한다면, 밀레랑주의에 의해서도 타락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선언에서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은 채로 놔둠으로써 이러한 타락을 가중시키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은 아니다.”
그리고 유명한 팸플릿 <<사회주의와 전쟁>>에서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 임무는 제국주의 전쟁을 내란으로 전화시키라는 슬로건에 의해서만 올바르게 표현된다. 그리고 전쟁 중에 모든 일관되게 수행되는 계급투쟁과 모든 진지하게 행해지는 '대중행동' 전술은 필연적으로 이 슬로건에 이르게 된다. 강력한 혁명운동이 강대국들의 첫 번째 전쟁 중에 불타오를지, 아니면 두 번째 전쟁 중에 불타오를지, 전쟁 중일지 아니면 후일지 예언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어느 경우든, 바로 이러한 방향으로 체계적이고 확고하게 작업하는 것이 우리의 본연의 임무다.”
나아가 우리는 전 세계 나라들에서 정치적 조건이 불균등하게 발전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대중이 더 일찍 떨쳐 일어서는 나라들이 있을 것이다. 우한이 성도(省都)인 중국 후베이 성에서, 나이지리아, 콜롬비아, 볼리비아, 파나마 등지에서 이미 록다운과 반동적 국가 폭력에 대항하는 대중의 자연발생적인 폭동이 있었다. 브뤼셀에서는 경찰이 19세 청년을 록다운 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사살한 뒤 폭력적인 충돌이 일어났다. 계엄령 식 록다운 정책이 단지 일시적으로 대중의 분노를 억제할 수 있을 뿐, 조만간 정치적 폭발을 가져올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혁명가들의 임무는 조만간에 필연적으로 닥칠 일에 대비해 전위와 대중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배외주의적 보나파르트주의 국가기계의 해체
배외주의적 보나파르트주의 국가기계 ㅡ 뉴 리바이어던 ㅡ 에 대항하는 정치투쟁이 중심 고리로서 그 필요성이 긴박하게 제기되는 근저에는 국가에 대한 맑스주의자들의 근본적인 평가가 놓여 있다. 이 문제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자본가 국가에 대한 맑스주의적 분석을 간단히 요약해보자.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경제적 영역이고, 그 다음으로 국가는 떼어내도 상관없는 정치적 맹장 같은 것으로 존재한다고 상상하는 “맑스주의자들”이 많다. 이것은 널리 퍼진 오해다. 우리는 그 반대가 사실이라는 것을 항상 강조해 왔다.
자본주의는 (계급적) 대립물의 통일이다. 자본주의는 오직 경제적 생산관계와 정치적·사회적·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의 총체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들 서로 다른 층위는 상호 의존적이며 상호 의존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맑스가 ㅡ 그리고 그를 좇아 우리도 ㅡ 그냥 경제학이 아니라 정치경제학에 대해 말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부르주아 국가기구가 작업장에서의 잉여가치 착출에 조응하는 법적 관계를 보장해주고, 필요할 경우 폭력으로 이를 집행해주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작업장에서의 잉여가치 착출은 없을 것이다. 제국주의 부르주아지는 자신을 보호해줄 국가가 없다면 세계시장에서 목표를 이룰 수 없을 것이다. 국가는 세계적 규모에서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필요하다면 관세와 대출 보증과 외교로, 심지어는 전쟁으로 제국주의 부르주아지를 지켜준다. 나아가 피억압 계급·계층을 지배 부르주아지에게 매어놓고서 착취와 억압에 어느 정도 타협하도록 만드는 촘촘히 짜인 이데올로기적 거미줄이 없다면, 계급갈등에 휩싸이는 사회의 모순적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학교, 대학, 언론매체의 역할이 여기서 비롯한다.
그렇다면 자본이, 그리고 그에 따라 자본주의가 상호 연관된, 그리고 그럼으로써 사회적인 노동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하여 자본은 상품 교환과 자본에 의한 잉여가치 생산이 사회적으로 조직되고 규제될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 여기서 국가, 법적 관계, 사회 등의 중요성이 나온다. 나아가 자본은 가치 창출 상품인 노동력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재생산되어야만 ㅡ 사회적 활동 (여가, 가족 등)을 통해 회복되고, 아이들의 출산과 양육을 통해 새로운 노동력으로 보전되어야만 ㅡ 존재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다시, 국가의 규제·개입 활동을 필요로 한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론적으로 정식화가 나온다. ‘자본주의는 상품과 자본의 생산·재생산뿐만 아니라, 이를 가능케 하는 기본적인 사회적 조건의 생산·재생산을 또한 전제로 하고 있다.’ 볼셰비키 이론가 니콜라이 부하린은 1920년에 다음과 같이 적절히 지적했다. “재생산 과정은 생산의 물질적 요소를 재생산하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생산관계 자체를 재생산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확대 재생산은 기존 생산관계의 확대 재생산을 의미한다. 기존 생산관계의 범위와 폭은 더 커진다. 기존 생산양식은 그 구성부분들의 내적 재편성과 함께 ‘확산’된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재생산은 그 내용물의 재생산이다...”
따라서 자본가 국가의 사회적 기능은 “중립적 활동”이 아니라, 맑스가 <<프랑스 내란>>의 첫 초안에서 표현했듯이 “계급지배 기구”로서의 그 역할에 붙매여 있는 기능이다.
러시아 볼셰비키 대표단은 1차 세계대전 중의 치머발트 운동을 위해 쓴 테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가의 ‘본질’은 그 자신 안에 있는 중앙집권이 아니라 그것의 사회적 억압 기능에 있다. 자본의 ‘본질’이 생산수단의 기능이 아니라 인간들 간의 관계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국가의 중심 성격이 한 계급의 타 계급에 대한 지배를 확실하게 해주는 것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레닌이 말했듯이, “국가는 특별 무력 조직이다. 국가는 일부 계급의 억압을 위한 폭력의 조직이다.” 이러한 국가는 독점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국내의 적 (즉 노동자계급과 민중)뿐만 아니라 외국의 적 (다른 강대국 라이벌들과 남반구 피억압 인민)에 대해서도 방어한다. 부하린의 “제국주의 강도 국가” 범주는 이 (국가)기계에 아주 잘 들어맞는 성격규정이다.
본서에서 개괄한 것처럼, 현 자본주의 3중 재난은 배외주의적 국가 보나파르트주의로의 전 세계적 전환을 가져오고 있다. 이는 “일부 계급의 억압을 위한 폭력의 조직”이라는 자본가 국가의 핵심 특징이 훨씬 더 두드러지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파국적인 경제위기와 계급 간, 국가 간 모순의 급가속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시기의 자본주의는 이와 같은 배외주의적 보나파르트주의 국가기계 없이는 작동할 수 없다. 따라서 이 기계에 대항하는 투쟁은 어느 혁명 조직의 정치 전략에서도 그 중심에 놓여야 한다. 즉 “국가권력의 강철주먹”없이 자본주의가 존재할 수 없다면, 혁명가들은 이 반동적인 압제의 주먹을 깨부수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
혁명적 전략은 배외주의적 보나파르트주의 국가기계를 해체하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걸로 다 환원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강령은 이행강령의 모든 핵심 요소들 ㅡ 부르주아지에 대한 몰수·수탈과 은행·기업에 대한 노동자통제 하의 국유화, 노동자·민중의 무장봉기에 의한 자본가 국가 타도와 대중의 행동평의회에 기반한 노동자·민중 정부로의 대체 등 ㅡ 을 담고 있는 경우에만 혁명적 강령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글로벌 반혁명 공세는 현 시기에 이러한 이행강령 내 특정한 추가적 요소를 부각시킨다. 배외주의적 보나파르트주의 국가기계 분쇄를 위한 혁명적 민주주의 투쟁이 그것이다. 요컨대, 배외주의적 국가 보나파르트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은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투쟁과 같은 것이 아니며, 같은 것일 수도 없다. (또는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투쟁을 대체하지 않으며, 대체할 수도 없다.) 그러나 배외주의적 국가 보나파르트주의에 대한 투쟁을 맑스주의 강령의 핵심 요소로 배치하지 않고서 사회주의혁명으로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혁명적 민주주의 투쟁: 새 시기 맑스주의 전략의 핵심 요소
현 글로벌 반혁명 공세의 근본적인 반민주적 성격과 그 따른 배외주의적 국가 보나파르트주의와의 투쟁의 중요성으로 볼 때 지금 열린 새로운 시기에서는 민주주의 문제가 중심 지위를 점할 것이다. 최근의 사태발전이 민주주의 문제에 비중을 더 추가해준 것이 분명하지만, 이것은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다. 실제로 현 배외주의적 국가 보나파르트주의는 수 년 전부터 이미 진행된 반민주적 사태발전이 질적으로 한 단계 도약한 것이다.
우리는 2016년에 채택된 RCIT 강령에서 이미 이 점을 지적했었다. “민주적 제 권리를 위한 투쟁은 이러한 쇠퇴하는 자본주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이슈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배계급은 필연적으로 민주적 제 권리를 침해, 유린하며 제한된 부르주아 민주주의까지도 자본주의적 보나파르트주의와 독재로 대체하려고 애쓴다.”
우리는 2015년에 발표한 팸플릿에서 이 사태발전을 보다 세부적으로 분석했다. 여기서는 그 분석의 가장 중요한 결론을 요약하고 이 결론이 현 정세에 갖는 적실성을 논의하는 것으로 국한하고 넘어갈 것이다. 이 팸플릿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본주의 쇠퇴기에 민주주의 문제는 반식민지 나라들뿐만 아니라 21세기 제국주의 중심부에서도 계급투쟁에서 점하는 중요성이 증대된다는 것이 우리의 기본 테제다. 위 인용문 중 하나에서 레닌은 "제국주의는 논란의 여지없이 민주주의 일반의 '부정'이다"라고 말했다. 지난 120년의 경험은 레닌의 테제가 제국주의 시대 전체적으로는 근본적으로 옳지만, 이 시대 내 서로 다른 모든 시기들에 있어서는 꼭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여러 이유로 인해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기는 확실히 대부분의 제국주의 나라들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확립된 시기였음을 우리는 상세히 설명했다. “그러나 2008/09년 자본주의 위기의 새로운 역사적 시기의 시작과 함께 질적 변화가 일어났다. 당연히 이 질적 변화는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선행 발전의 결과였다. 우선 자본주의 위기가 질적으로 심화되었고 따라서 부르주아지의 양보 여지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러한 경향의 한 예로서 우리는 제국주의 나라에서 노동자계급의 일부로서 이주자 문제의 중요성과 이주자 및 난민에 대한 배외주의 문제를 지적하였다. 그 밖에 우리가 거론한 다른 특징들은 “제국주의 국가에 의한 주민 감시의 끝없는 확대, 민주적 권리의 침해 증가, 늘어나는 제국주의 전쟁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말리, 시리아 등)”이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이 ‘제국주의 강도 국가’는 국내와 국외에서 모두 지배계급의 점점 더 공격적인 도구가 되고 있다.”
이와 같이 이미 몇 년 전에 RCIT는 2008년에 시작된 역사적 시기 이래로 어떻게 부르주아지의 반민주적 공세가 가속화하고 있는지에 대해 밝힌 바 있다. 우리는 또 민주적 권리에 대한 그러한 공격의 중대한 요소들을 확인해냈다. 우리는 2020년에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을 예견하지 못했고 할 수도 없었지만, 배외주의와 보나파르트주의 국가의 역할 증대에 대해 경고했다. 그리고 민주주의 문제가 노동자·피억압자의 해방투쟁에서 그 비중이 크게 늘고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민주주의 문제의 현실 관련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레닌과 트로츠키의 접근법에 기초해 있다. 맑스주의 고전들은 민주주의 문제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의 중요한 요소라고 항상 강조해왔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시작 몇 달 전에 레닌은 민주주의 문제의 현실 관련성을 과소평가한 동지들을 겨냥하여 논박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썼다.
“이 견해 [민족자결은 자본주의하에서는 불가능하며 사회주의하에서는 불필요하다는 ‘제국주의적 경제주의자’의 견해 - 역자]는 민주주의의 의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주의는 민주주의 없이는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1)프롤레타리아트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의해 사회주의혁명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혁명을 수행할 수 없고, (2)일단 승리한 사회주의도 완전한 민주주의를 실시하지 않고서는 승리를 공고히 하고 인류를 국가의 소멸로 이끌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혁명적 전략 내 민주적 제 권리 투쟁의 중심 지위가 나온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는, 특히 제국주의는 민주주의를 환상으로 만든다. 그럼에도 동시에 자본주의는 대중들 사이에서 민주주의적 열망을 낳고, 민주주의적 제도를 만들어내며, 제국주의의 민주주의 부정과 대중의 민주주의 지향 사이의 적대를 격화시킨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는 오직 경제적 혁명에 의해서만 타도될 수 있지, 민주주의적 개조 — 가장 ‘이상적인’ 것일지라도 — 에 의해서는 타도될 수 없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훈련되지 않은 프롤레타리아트는 경제적 혁명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
다양한 비평가들은 RCIT가 민주주의 문제에 중점을 둠으로써 계급투쟁과 사회주의 목표를 손상시킬 것이라고 비난해왔다. 우리는 언제나 그런 터무니없는 말은 사양해 왔다. 첫째, 민주주의 투쟁은 계급투쟁의 일부분이고 그것과 분리되지 않는다. 둘째,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ㅡ 개량주의적 각도가 아닌 혁명적 각도에서 접근한다면 ㅡ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고 첨예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민주주의 문제를 개량주의적인 방식으로가 아니라, 지배계급에게 청원하는 고립된 호소로서가 아니라, 혁명적 방식으로, 즉 노동자·민중을 모아내는 규합 슬로건으로서 제출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가